[시각]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정부 R&D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기술개발(R&D)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술을 개발하는 방법도 다양하고 새로운 방법도 계속 나옵니다. 그런데 정부 R&D 과제는 기획자들이 비효율적인 특정 스펙(사양)만 요구합니다. 그럼 R&D할 곳이 특정 업체로 제한됩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업체도 그 기술로는 제품을 안 만든다는 겁니다."

"기술발전은 빠릅니다. 신기술도 계속 나옵니다. 하지만 정부 R&D는 제품에 쓸 수 없는 흘러간 기술을 제안요청서(RFP)에 넣습니다. 그 기술을 개발한 업체가 개입한 거죠. 그 업체는 개발비만 챙기고 상품은 절대 안 내놓습니다."

정부 R&D 과제에 제안서를 냈던 업체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얘기다. 그들은 "기술력이 부족해서 떨어졌다"는 말보다 "인맥 싸움에서 졌다"고 하소연한다. 몇몇 연구자들이 과제를 기획하면서 자기들이 과제를 받아갈 수 있도록 이런저런 장벽을 쳐놓는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정부 돈은 눈먼 돈"이라며 "앞선 기술과 사업화보다는 인맥관리가 과제비 따는 비결"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돈다.

정부 R&D가 겉만 화려하고 속은 텅 빈 '외화내빈' 상태다. R&D 예산은 18조원을 넘었고 국가 전체로는 50조원이나 된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4.36%로 세계 1위 수준이다.

하지만 생산성은 세계 16위, 사업화율은 최하위권이다. 공공기관당 기술창업 건수는 0.7건으로 미국(3.8건)에 비해 턱없이 적다. 전문가들은 "실패용인, 도전의식과 상상력 발휘, 보상체계 구축" 등 여러 대안을 제시한다.

그러나 근본적 해결책은 R&D 관련자들이 쳐놓은 장벽을 거둬내고 자신들을 위해 뚫어놓은 구멍을 막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최근 정부의 R&D 예산이 '밑 빠진 독'과 같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조사결과가 나왔다. 김진태 국회의원실에서 산업기술평가관리원(KEIT)이 지난 2009년부터 5년 동안 지원한 1,271건의 과제를 분석했다. 과제와 관련된 4,048개 기관과 4만5,904명의 연구자들이 얼키설키 만들어낸 184만건의 관계를 세밀히 들여다봤다.

기술 로드맵 작성, 기술위원회·기획위원회(PD), 기획실무위원회, 과제선정평가위원회, 중간단계 평가위원회, 최종평가위원회 등 이런저런 이유로 R&D 기획과 평가에 참여한 연구자들과 실제 과제를 수행한 연구자와의 관계를 하나하나 뜯어본 것이다. 184만건의 빅데이터에 사회관계망분석(SNA) 기법을 사용했다.

결과는 예상을 크게 웃돌았다. 과제 기획에 관련된 연구자들 또는 그들이 속한 기관이 R&D 10건 중 6건을 받아갔다. 이른바 '셀프 과제'다. 세월호 사건으로 논란을 빚은 한국선급도 셀프 과제로 333억원의 연구비를 챙겼다. 모 연구원은 규정을 어겨가며 수많은 기획과 연구에 참여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가 열심히 R&D 투자를 늘려 관련자들의 주머니만 채워준 꼴이 됐다.

정부가 뒤늦게나마 R&D 과제의 연구원 간 유착관계에 대한 실태조사를 강화하고 개선책을 연말까지 마련하겠다고 나섰다. R&D 예산의 뚫린 구멍을 막고 성과를 낼 수 있는 해법을 찾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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