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 4월28일, 런던 웨스트민스터. 하원에 출석한 윈스턴 처칠 재무장관이 금본위제도로의 복귀를 공식 선언했다. 목적은 1차 대전 이전으로의 회귀. 금으로 뒷받침되는 파운드화 가치가 대영제국의 옛 영광을 재연할 것이라는 믿음이 깔려 있었다. 문제는 환율과 고용ㆍ물가 등 어느 것 하나 만만한 게 없었다는 점. 4.86달러와 교환되던 파운드화 가치는 한때 3.40달러를 기록할 만큼 떨어지고 물가는 전전의 2배 수준에서 좀처럼 내려가지 않았다. 실업자도 700만명이나 우글거렸다. 악조건에서도 잉글랜드은행과 경제학자들은 복귀를 강력하게 밀었다. 잉글랜드은행은 파운드화 가치가 떨어질 경우 미국 연준리와 모건은행에서 각각 1억달러를 지원 받는다는 크레디트라인을 개설해 반대론을 잠재웠다. 소장 경제학자 케인스(당시 42세)만이 ‘재앙’을 예고했을 뿐이다. 케인스의 불길한 예언은 얼마 안 지나 현실로 나타났다. 인위적인 파운드화 강세로 석탄과 섬유ㆍ철강업 같은 주력산업의 가격경쟁력이 떨어져 경제는 침체의 나락에 빠졌다. 채산성이 나빠진 기업은 임금삭감을 요구하고 고물가 상황에서 임금이 깎이게 된 노동자들은 연쇄파업을 일으켰다. 영국은 부활은커녕 몰락의 길로 들었다. 국제공조도 엉망이었다. 프랑스는 영국의 혼란을 이용해 금을 빨아들이고 미국은 파운드화 평가절하를 촉구하는 대신 파운드 강세를 측면 지원하기 위해 금리를 내렸다. 미국의 저금리는 대공황 직전 주식시장의 이상과열이라는 부작용을 빚었다. 약세 통화의 고평가는 과거의 문제가 아니다. 처칠이 훗날 ‘최악의 선택’이었다고 토로한 영국의 금본위제도 복귀는 파운드를 달러로, 금본위제도를 국제기축통화로 바꾸면 오늘날 세계경제가 처한 위기구조와 별반 다를 게 없다. 음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