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뿐인 네거티브 규제 전환… "페이팔도 한국서 창업했다면 실패"

열거된 것만 허용하는 '포지티브 규제' 여전
핀테크·ICT·헬스케어 등서 융복합 가로막아
정권마다 발표때만 요란… 이행 실적은 미미




#1. 소프트웨어 개발자인 김철호씨는 지난해 비트코인 기술을 응용, 국내 최초의 가상화폐인 '독도코인'을 개발했다. 그러나 규제의 벽에 가로막혀 법적인 전자화폐로 인정받지 못했다. 이제 막 개발된 독도코인은 전자금융거래법상 '2개 이상 광역지자체의 500개 이상 가맹점에서 이용'되고 있거나 '구입할 수 있는 재화·용역 범위가 5개 이상'이어야 한다는 등의 열거식 전자화폐 규정을 충족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2. 한 재생에너지 기업은 일본·유럽 등에서 이미 상용화된 하수·하천수 신재생 에너지 사업을 추진했으나 규제 때문에 포기했다. '신에너지 및 재생에너지 개발·이용·보급 촉진법'상 신재생에너지 정의에는 태양·수력·해양 에너지 등 여덟 가지만 재생에너지로 규정하고 관련 사업을 지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수·하천수와 와 공기의 온도 차를 이용한 재생에너지는 탄소가스를 배출하지 않고 기존 에너지원을 활용한다는 점에서 다른 재생에너지와 다를 바가 없지만 별도의 입법이 이뤄지기 전까지는 차별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다.

역대 정권마다 신사업·융복합사업 활성화를 위해 '포지티브 규제'에서 '네거티브 규제'로의 전환을 강조하고 있지만 성과는 미흡한 것으로 나타났다. 제조업 전체에 대한 규제도 문제지만 이른바 미래형 '신사업'들이 규제 때문에 싹도 피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23일 '네거티브 규제방식 추진 동향과 활성화 방안' 보고서에서 한국의 규제 방식이 포지티브 방식을 취하고 있어 새 분야를 수용하는 데 선진국보다 뒤처지게 됐다고 지적했다. 미국·영국 등 선진국은 금지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원칙적으로 허용하는 '네거티브 규제' 방식이지만 한국은 열거된 것만 허용하고 나머지는 모두 금지하는 '포지티브 규제'가 대부분이다.

포지티브 규제에 가로막혀 신사업 성장이 더딘 대표적인 분야는 융복합 기술이 강조되는 핀테크(fintech), 정보통신기술(ICT), 자율주행차, 헬스케어 등이다.

핀테크 선진국인 영국은 네거티브 규제 방식으로 인해 새로운 금융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체들이 지난 2000년 이후 급격히 성장했다.

전 세계 최초의 대출형 크라우드펀딩 업체인 '조파(Zopa)'와 최초의 지분투자형 크라우드펀딩 업체인 '크라우드큐브'가 영국에서 탄생할 수 있었던 데는 이 같은 규제 여건 덕택이다. 이후 영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크라우드펀딩이 성업 중이지만 국내에서는 겨우 올해 7월 자본시장통합법상 관련 규정을 추가하면서 걸음마를 뗐다.

전자화폐 역시 법에 열거된 범용성 규정을 만족시켜야 합법으로 인정받기 때문에 전자화폐를 기반으로 한 스타트업들의 창업이 지지부진하다. 최원락 전경련 규제개혁팀 부장은 "미국의 페이팔은 '페이팔 밸런스'라는 전자화폐를 기반으로 한 결제 시스템인데 만약 페이팔이 우리나라에서 창업했다면 초기에 법적인 전자화폐로 인정받지 못해 성공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밖에도 자율주행 자동차, U헬스케어 등의 융복합 신사업의 발전도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 자동차관리법이나 의료법이 나열된 것 외에는 모두 금지하고 있어 새로운 시도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정부도 포지티브 규제 수술에 대해 손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명박 정부는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에서 2011년 말까지 네거티브로 법령의 50% 이상을 정비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박근혜 정부도 2013년 8월 '네가티브 규제방식 확대 종합대책'을 대대적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발표 때만 요란하고 이후 후속 조치는 미흡했다. 당초 2011년 말까지 200건의 법령을 정비하려고 했으나 실제로는 46.5%인 93건만 완료됐다. 또 박근혜 정부가 "기업활동 규제의 45%를 네거티브 혹은 네거티브 수준으로 완화하겠다"는 정책의 이행 실적은 당해 연도에만 공개되고 2014년부터는 감감무소식이다.

지난해 규제장관회의에서 행정규제기본법개정을 통해 네거티브 규제 방식을 우선 고려하겠다는 방침을 정했지만 언제 법이 통과될지 모를 일이다.

고용이 전경련 규제개혁팀장은 "네거티브 규제 방식을 확산시키기 위해서는 이행점검 체계를 제도화하고 행정규제기본법을 개정하는 등의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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