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 산책] 남북관계 개선 돌파구는 문화다


원래 하나의 공동체였다가 둘 이상으로 분단된 나라가 다시 하나로 돌아가려면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렇게 하나로 되돌아갈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자칫 분단 상황이 영원히 고착돼버릴 수도 있다.

영구 결별의 징후를 나타내는 현상적 지표로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분단 역사가 100년을 넘기면 안 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두 나라 국민의 평균 신장이 10㎝ 이상 차이나면 안 된다는 것인데 이는 곧 경제력ㆍ생활수준의 차이를 말한다.

DJ도 MB도 문화적 접근엔 소홀

평균 신장을 살펴보면 북한군의 지난 2010년 입대기준은 키 137㎝ 이상이었다. 한국군은 158㎝ 이하면 공익요원, 145㎝ 이하면 면제였다. 현역 입대 기준 신장이 10㎝ 이상 차이가 나므로 우리 세대와 이 시대의 정치적 지도자들은 궁극적으로 무거운 책무를 떠맡고 있는 형국이다.

그동안 박정희 정권의 '한국적 민주주의'나 김일성 정권 이래의 '우리식 사회주의'는 서로를 '괴뢰 정권'이라 부르면서도 상대방으로 인해 자기 정권 유지의 명분을 확보하는 버팀목 기능을 나눠 가졌다. 한반도의 남북에서 내용은 다르나 형식이 같은 정치적 도그마가 장기간 통용됐다는 사실은 기묘하면서도 상징적이다.

그렇게 어려운 것이 남북관계다. 다변화하는 국제관계를 외면하고 폐쇄된 울타리 속에서 호전적 모험주의를 고수해온 북한은 김일성 또는 김정일의 사후에도 별반 변한 것이 없다. 결국 우리는 정치ㆍ경제ㆍ사회ㆍ군사 등 여러 측면의 남북관계에 상대성 원칙을 적용하고 배타적으로 국기(國基)를 지켜나갈 수밖에 없다.

이 근간을 무너뜨리면 국가 정체성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그러나 사방이 막혔을 때 남은 방향은 인식의 영역을 위로 확대하거나 의식의 심층을 아래로 확장하는 길이다. 이는 정치 이전의 정치의식, 경제 이전의 경제의식과 같이 우리 삶의 근본을 이루는 문화의 길을 말한다. '언어도단(言語道斷)이면 심행처(心行處)'라는 옛말도 이와 같은 새 길을 일컫는다.

김대중(DJ)의 햇볕정책은 남북 간의 긴장을 완화하고 화해 무드를 조성하려는 시도가 좋았다. 다만 각론에 있어 정치보다 문화적 접근을 앞세웠어야 옳았다. 이명박(MB)의 상호주의는 남북관계의 보편적 질서를 지키려는 의도가 좋았다. 다만 고착적이기보다는 탄력적이어야 했고 상충 가능성이 낮은 문화적 접근으로 활로를 여는 것이 옳았다.

지난 10년간 북한에서 가장 인기 있는 소설은 홍석중의 '황진이'다. 작가는 '임꺽정'을 쓴 벽초 홍명희의 손자이며 '리조실록'편찬을 주도한 국어학자 홍기문의 아들이다. 이 소설에 이제껏 북한문학에서 볼 수 없었던 성애 묘사와 체제순응적 표현의 희석 등 차별성이 나타난 것은 북한문학의 중심인 '주체문학론'과 방향이 조금은 다른 '현실주제문학론'의 증빙이다.

'평양판 황진이'는 문호개방 시금석

그 변화는 북한문학이 아직 겪어보지 않은 세계로 내미는 여린 촉수에 불과하지만 북한이 60여년간 폐쇄했던 문호를 개방하는 하나의 시금석이 될 수 있다면 평양판 황진이는 역사적 책임을 감당한 것이 된다. 문학과 문학외적인 삶이 외형은 다를지라도 내포적 의미에서 긴밀히 소통되는 것이기에 문화의 길이 새 역사의 길을 예비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근자에 3,000쪽에 이르는 북한문학 연구자료 총서 4권을 엮어내면서 필자는 홍석중의 황진이처럼 북한문학의 변모를 반영하는 여러 등장인물들을 만났다. 그리고 이들이 견인할 남북한 문학의 접점과 새로운 문화통합의 가능성에 대한 기대로 한동안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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