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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현대·기아차가 해외판매 누적 대수 5,000만대를 돌파했다. 기아차가 1975년 '브리사 픽업' 10대를 카타르에, 이듬해 현대차가 한국 자동차 첫 고유 모델인 포니 6대를 에콰도르에 수출한 지 40년도 채 되지 않아 이룬 쾌거다. 현대차는 1986년 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에 현대 '엑셀'을 앞세워 진출했다. 첫해에 16만8,822대를 팔았는데, 이는 유럽이나 일본 업체도 달성하지 못한 기록이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위기가 닥쳤다. 내구성의 결함이 드러나고 서비스망도 허술해 현대차의 미국 판매는 급감했다. 1998년에는 미국 판매량이 9만대까지 떨어졌다.
정몽구 회장은 1999년 '10년, 10만 마일 품질 보증'을 통해 정면 돌파를 선언했다. 품질경영에 대한 자신감이 바탕이 된 결단이었지만 경쟁업체들은 '미친 짓'이라고 폄하했다. 하지만 이 전략은 히트를 쳤다. 바로 그 해 미국시장 판매량이 16만 4,190대를 기록, 전년보다 82% 늘었으며 2001년에는 34만대를 넘게 팔았다. 미국 경기가 최악에 처한 2009년에는 현대차를 구입한 후 1년 내에 실직하면 회사가 차를 다시 사주는 '어슈어런스 프로그램(assurance program)'을 도입했다. 결국 미국 자동차 수요가 21%나 줄어든 이 해에도 현대ㆍ기아차는 9% 성장했다.
'마케팅 3.0'이란 개념으로 화제를 모았던 필립 코틀러 미국 노스웨스턴대 켈로그경영대학원 석좌교수가 동생 밀턴 코틀러 코틀러마케팅그룹 회장과 함께 '어떻게 성장할 것인가'란 책을 냈다. 이 책은 경기침체기에 새로운 성장 기회를 찾기 위해 어떻게 마케팅을 활용할 지에 초점을 맞춘다. 저자들은 현대차를 예로 들며 공포에 사로잡혀 비용 절감과 가격 인하에 나서는 대신 전략을 다시 세우는 것이 성장을 위해 합리적이라고 강조한다.
저자들은 올해부터 2023년까지 10년간 세계 경제를 주도하면서 성장 기회를 가져다 줄 메가 트렌드를 9가지로 압축해 설명한다. 가장 먼저 눈여겨봐야 할 트렌드는 '세계적 부의 재분배'다. 세계의 부는 충분하지만 분배가 왜곡되면서 소비와 투자가 이뤄지지 않고 있는 상황. 대부분의 국가에서 부의 양극화가 심화됐다. 개발도상국에서는 백만장자가 상당수 탄생하는 반면 일반인들은 구매력이 떨어져 소비가 살아나지 않고 있다. 이럴 때 고가 사치품을 판매하는 기업은 최상층 부자들을 겨냥한 틈새 마케팅을 고려할 수 있다고 저자들은 조언한다.
세계화와 현지화를 합한 의미인 '글로컬라이제이션(glocalization)'도 주요 트렌드 중 하나. 세계화를 추구하면서 현지 국가 기업 풍토를 존중하는 경영방식을 뜻하는 것인데 세계에서 각 국가로, 다시 지역으로 전략적 집중을 시도하라는 조언이다.
지속적 도시화와 사회기반시설 확충, 녹색 경제와 가속화, 소비자 역량 강화, 극심한 경쟁과 파괴적 혁신도 기업이 놓치지 말아야 할 주요 흐름이다. 급변하는 사회적 가치와 새로운 집단의 대두 역시 큰 이슈다. 저자들은 디지털 혁명으로 다른 사람의 믿음과 규범을 더 잘 이해하고 자신과 다른 사람의 차이를 분명하게 인식하게 됐다며 그들만의 특별한 욕구와 바람을 가진 다양한 마이크로 집단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또한 모든 기업에는 두 종류의 마케팅 부서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이미 만들어놓은 제품과 서비스를 파는 일반 마케팅부서와 미래의 제품을 준비하는 전략 담당부서다. 저자들은 "기업들은 거대한 시장만을 고려하기 때문에 작은 시장을 간과하는 경우가 많다"며 "고성장 시장에서도 판매가 줄어드는 제품이 있는 것처럼 저성장 시장에서도 성장하는 제품이 있다"고 강조한다.
세계적으로 저성장 국면에 들어서면서 기업들의 고민이 깊어지는 이 시점에 세계적인 마케팅 전문가가 들려주는 저성장 시대의 생존법은 우리 경제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1만 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