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으로만 보면 우리의 행동이 법이나 제도에 의해 규제되고 있는 것 같지만 정작 사람을 가장 단단히 옥죄고 있는 것은 규율보다는 고정관념이나 관행이다. 오랫동안 몸담았던 환경이나 습관이 축적되면서 사람들은 아무 강제성도 없는데 간단히 그 ‘관행’이라는 테두리에 스스로 가두는 경우가 많다.
그동안 발휘했던 능력과 기존에 해왔던 방식, 그리고 이미 해봐서 훤히 알고 있는 상식과 지식의 적용 등이 나에게 또 다른 재능이, 혹은 기존의 방식보다 훨씬 능률적인 어떤 가능성이 숨어 있을지도 모르는데 관념이나 관행이라는 틀로 번번이 그 가능성을 불식시키고는 한다. 그래서 ‘이게 내 최선이야, 역시 이게 가장 편하고 좋아’ 하면서 그 틀 속에 쉽게 안주해버린다.
늘 배를 타고 강을 건너던 시대에 누가 다리를 놓아 저 강을 건너겠다는 생각을 했을까. 복잡한 지상을 피해 땅속에 길을 내겠다는 아주 엉뚱한 발상은 맨 처음 얼마나 큰 비웃음과 저항에 부딪혔을까. 따지고 보면 처음에는 그저 말도 안되는 소리로 무시되고, 혹은 무모하고 때론 위험천만한 아이디어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아주 당연하게 그 땅속 길과 한강의 다리를 이용하는 일상을 살고 있다.
창조란 깨어 있는 상태이다. 깨어 있는 사람은 늘 그렇게 돼오던 당연함에 대해서도 문득 의문을 제기할 줄 안다. 어째서 이것이 항상 옳은지, 왜 항상 이 방식을 선택해야 하는가에 대해 새삼 반발하기도 한다. 뛰어난 예술가는 스승이 가르쳐준 것에서 더 나아가 자기만의 표현 영역을 새로이 개척해내면서 비로소 스승과 자신의 이름을 함께 빛낸다.
역사적으로 위대하다고 일컬어지는 모든 예술 작품은 이렇게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냈다는 걸 인정받은 작품이다. 예술뿐만 아니라 오늘날 히트 상품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대부분 새로운 기능, 새로운 서비스를 도입하면서 실패에 대한 위험 부담을 무릅쓰고 도전해 성공한 것들이다.
조지 버나드 쇼는 ‘세상은 합리적인 사람과 비합리적인 사람으로 구성돼 있다’고 말했다. 합리적인 사람은 세계를 주어진 그대로 받아들이지만 비합리적인 사람은 세계를 변화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합리성은 세상을 잘 조화되도록 하고 안정을 유지시켜 주는 데 큰 힘을 발휘하지만 비합리성은 지금의 현실에 끊임없이 문제 제기를 하면서 대안을 내놓거나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우리가 일상에서 감수하고 있는 문제점이나 불편에 대해 ‘정말로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인지’ 의심해본 적이 있던가. 그 의심에 대해 답을 찾고 있는 중이라면 당신은 세상을 바꿔놓을 수 있는, 막힌 문제를 푸는 열쇠를 얻게 될지도 모른다. 합리적인 사고에서 답을 얻을 수 없었다면 비합리적인 사고가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