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6년 병자호란은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사건이 아니었다. 청나라와의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러 전쟁이 일어날 것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었다. 앞서 1627년 정묘호란 때도 적군(당시 후금)은 황해도 평산까지 왔었다. 새 전쟁은 사생결단의 대결이 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조선 정부는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과거의 경험에 매달려 산성에서 버티기로 한 것이다. 이번에는 상대가 달랐다. 속도전으로 급습했다. 1636년 12월9일 압록강을 건넌 후 파죽지세로 남하해 16일에는 남한산성을 포위한다. 의주성·평양성 등 주요 거점을 버려두고 서울(한양)만을 노렸다. 결국 개전 일주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임금도 산성에 갇혔다. 추위와 굶주림에 떨던 인조는 이듬해 1월30일 남한산성을 나와 항복했다. 남한산성은 지금 봐도 천혜의 요새다. 병자호란 때도 함락되지 않았다. 문제는 사람에게 있었던 것이다. 사진은 국왕이 머무르던 행궁의 좌전과 우실이다. 이는 종묘사직에 해당되는 건물이다. 북한산성이나 수원화성 등 다른 행궁에는 없는 남한산성 행궁만의 특징이다. 그만큼 남한산성의 역할이 중요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