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 나의 인생/나춘호 예림당회장] 32.아버님에 대한 회상

꿈에 소를 보면 조상을 뵙는 것이라 했던가. 상당수의 사람들은 꿈자리가 어지럽거나 사는 것이 어려워 하소연하고 싶을 때면 부모님 묘소를 찾는다. 아무리 불러도 대답은 없지만 주저앉아 풀 포기 뽑아가며 속내를 털고 나면 위안이 되는 것이 부모님의 묘소이다. 부모의 존재는 죽어서도 그런가 보다. 나도 몇 해 전 큰 수술을 받고도 삶을 더 보장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추석 명절 때 고향에 갔다가 어머니 묘소 앞에서 오열을 한 적이 있다. 지나온 세월을 반추하면서 어린 시절 부모님의 회상이 겹친 그야말로 만감이 뒤섞인 오열이었다. 아버님은 내가 15살 되던 해에 돌아가셨다. 당시 나에게는 참으로 큰 충격이었다. 사춘기 감수성이 예민하던 나이여서 그렇기도 했지만 어려서부터 유난히 아버지를 따랐기 때문이다. 지금도 아버지를 생각하면 한없이 그리운 마음이 든다. 하지만 아버지는 유택조차 없으시다. 결핵을 앓다 돌아가셨고 평소 유언에 따라 화장을 한 까닭이다. 아버지 묘소가 있었다면 사회에서 시련을 겪거나 결단을 내리기 어려울 때 이따금 찾았을 것도 같다. 그러니 어찌 보면 묘를 쓰는 것도 살아 있는 자가 스스로 위안을 삼으려는 이기의 발로가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든다. 아버지(羅洪祚)는 농사를 지으면서 사셨지만 좀 특별한 구석이 많았다.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의욕적인 분이면서도 낭만에 대해서도 관조하는 면이 남달랐다. 누님이 결혼할 때 신랑 친구들이 요구하면 노래 한 곡 정도는 부를 수 있어야 한다며 노래를 직접 만들어 가르쳐 주신 면만 봐도 그렇다. 칠순이 넘은 누님은 몇 년 전부터는 기억력이 떨어져 가사와 곡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고 안타까워하신다. 아버지에게는 형제처럼 가깝게 지내던 친구분들(정치호, 문해기, 김용주, 문도수)이 계셨다. 네 분은 틈만 나면 어울려 이야기를 나누셨다. 그리고 사람은 배워야 한다는 데 의견이 일치해 추렴을 해서는 훈장을 모셔다가 공부를 했다. 농사일을 마치고 밤마다 가르침을 받는 대신 생활비 일체를 대주셨다니 가난한 농민이었을지언정 배움에 대한 열기는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어렸을 때 아버지는 내가 보는 앞에서 어린 감나무를 심고는 “이건 네 나무니까 네가 돌봐야 한다” 하셨다. `내 감나무`를 갖게 되자 자연히 애착을 가지고 돌보게 됐다. 누님과 두 형 역시 아버지가 정해 주신 `내 감나무`가 있었다. 아버지는 또 서랍장을 한 칸씩 우리 네 남매에게 지정해 주셨다. 그래서 각자 자기 옷이며 물건을 정돈해 넣어 두게 했는데 지금 생각하니 아이들에게 정리 정돈과 책임감을 체득 시키는 데 참으로 지혜로운 방법이 아니었다 싶다. 일의 선후 처리나 감정 정리에도 아버지가 논리적이고 심사숙고하시는 편이었다면 어머니는 현실적이고 즉흥적이셨다. 외가인 어머니 친정은 집안도 괜찮고 살림살이도 제법 넉넉해서 외삼촌 한 분은 일본에 유학까지 하셨다. 하지만 어머니는 열 여섯 살에 가난한 집안에 시집와서 농사일 하랴, 어린 시동생 시누이 건사해 시집ㆍ장가 보내랴, 어느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었다. 그래서 였을까 두 분 사이는 원만한 편이 아니었다. 어릴 때 기억에도 두 분의 다투던 모습이 남아 있다. 그 때는 왜 그렇게 다투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내가 결혼하고 자식 낳고 살다 보니 조금씩 그 이유를 알게 됐다. 누님이 결혼하던 그 해 나는 열 두 살이었는데 아버지가 느닷없이 물으셨다. “아버지가 갑자기 죽으면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당시 전혀 생각지 못했던 엉뚱한 질문에 답변도 못하고 쩔쩔매던 일을 지금도 기억한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다. <이진우기자 rain@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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