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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조선산업은 지금부터 수 년 안에 눈부시게 발전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결국 후판물량이 크게 늘 수 밖에 없다고 판단됩니다.” (장세주 동국제강 회장ㆍ당시 전무) 지난 93년말 중구 수하동에 위치한 동국제강 2층 회장실에선 후판 생산 라인을 증설하자는 제안을 둘러싸고 격론이 오갔다. 장세주 회장은 이 자리에서 “기회가 항상 오는 것은 아니다”며 공격적인 선택을 요구했다. 반면 여타 임원들은 장 회장의 제안에 대해 유보적인 자세였다. 가장 큰 이유는 시대적으로 ‘고속성장기’가 지나갔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후판 시장이 커진다는 것엔 동의하지만 2조원 가까운 천문학적인 투자비 부담으로 인해 시장 추세가 조금만 달라져도 회사 자체가 위기에 처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만드는 것이 문제였을 뿐 파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던 상황’인 포항 제1 후판공장을 건설할 때와는 상이한 경영환경이라는 지적이었다. 명운이 달려있는 결론은 어쩔 수 없이 최고경영자의 몫. 이 자리를 주제하던 고(故) 장상태 선대회장은 임원진의 의견을 듣고 한참을 고민한 후 “기업의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서는 미래 수요에 적극적으로 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장세주 회장의 손을 들어주었다. ◇멕시코에서 찾은 출구=후판 라인 증설은 결정됐지만 문제는 최신 설비 확보였다. 철강설비 노하우는 철강업체가 가장 풍부하게 확보하고 있으며, 이 같은 노하우를 얻어내기 위해서는 최신 설비시스템을 구입하는 것이 관건. “선진국 철강업체들을 무작위로 만나 후판용 최신 설비 구매가능성을 타진해보았지만 번번히 ‘협조할 수 없다’는 답변만 들었습니다.” 당시 일본과 미국에 급파됐던 장세주 회장과 김영철 사장(당시 기술담당 이사)는 설비구매 단계에서 커다란 벽에 부딪혔다. 이어지는 장세주 회장의 말은 이랬다. “그 때까지만 해도 미국이나 일본의 선진 철강업체들과 어떤 협조체제를 구축해 놓지 못했습니다. 느닷없이 찾아가 최신 설비를 내놓으라고 매달리니 상대방 입장에서 쉽게 승낙하기 어려운 입장이었겠지요. 특히 일본 기업들은 그동안 한국에 후판을 고가로 판매해왔는데 동국제강이 공급능력을 키우겠다니 떨떠름한 표정이 역력했습니다.” 일본에 머물며 무기력한 상태에 빠졌던 장 회장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귀가 솔깃한 소식을 들었다. “멕시코의 한 철강사가 정부의 자금 지원 약속을 믿고 설비투자를 한창 진행시켰는데 멕시코 경제악화로 정부자금 지원이 이뤄지지 않자 포장만 뜯어놓은 최신설비를 매각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회사에 보고하니 선대회장께서 곧 바로 전 임원들을 대동한 채 멕시코로 달려갔습니다.” 미국 및 일본의 설비공급 통로가 막힌 동국제강으로선 멕시코 철강업체의 설비 매각은 실낱 같은 기회였던 셈이고 동국제강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4년 후 크리스마스 이브=후판공장 신규 투자가 결정되고 설비확보, 공장 건설, 정상 가동에 이르는 순차적인 흐름이 모두 끝날 때까지는 동국제강은 최악의 위기를 겪어야 했다. 공격 경영을 선택한 지 무려 4년이 흐른 지난 97년11월 당시 동국제강은 포항 제2 후판 공장 건설 막바지 공사에 여념이 없었다. 국가 외환위기가 떠진 것이 바로 이 시점. 원자재(슬래브) 조달을 위해 병행 추진해온 베네수엘라 상공정 투자와 충남 당진 투자를 전면 보류했다. 공장 건설자금 조달도 빡빡했다. “당시 멕시코 철강사의 설비를 매입하면서 도입한 외자만 2억 달러에 달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투자자체가 무모했다는 소문이 나도는 시점이었는데 국가 경제 전체가 유동성 위기에 내몰리자 앞이 깜깜했습니다. 대출금을 조기에 상환하라는 압력은 당연했고요.” 김종대 홍보부장이 기억하는 1997년 겨울의 풍경이다. “당시 금융권에 (전경두) 사장이 점심식사로 5,000원짜리 음식점을 찾아 다닌다는 이야기가 회자됐습니다. 대출상환을 요구해오던 은행들 사이에서 ‘동국제강은 부도날 회사는 아니다’라는 신뢰가 생기는 듯 하더군요. 일부 은행은 적극적으로 자금을 지원하겠다는 약속도 했습니다.“ 그렇다 해도 회사 사활의 최대 관건은 제2 후판공장의 정상가동이었다. 해를 넘기는 것은 곧 자금 위기를 가속화시킨다는 의미였다. 박영훈 상무(당시 과장)는 그 때 심경을 이렇게 전했다. “기술 컨설팅을 담당했던 영국인 엔지니어로부터 98년 3월에야 공장 가동이 가능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눈 앞이 캄캄했습니다. 더 이상 버텨낼 힘이 없는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연말까지는 정상 가동을 시켜야 했습니다.” 동국제강의 모든 엔지니어들은 공장 조기 가동에 매달렸다. 휴일은 물론이고 밤샘 근무도 마다하지 않았다. 수십일 동안 강행군한 끝에 그해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에 후판 압연 라인이 굉음을 내며 가동되기 시작했다. 당진공장 증설 추진하기까지
JFE스틸 설비기술 도입위해 15차례나 찾아 끈질긴 설득
브라질 ‘쎄아라 스틸’ 건설땐 주·중앙정부와 4년간 협상도 "JFE스틸로부터 '기술 협조 불가'라는 최종 입장을 전달 받았습니다. 이후 일본에 15차례나 찾아가 피 말리는 설득 작업을 벌였습니다. JFE스틸의 기술 협력 결정은 어쩌면 동국제강의 끈질긴 설득 작업에서 비롯됐을 수 있습니다." (장세욱 전무) 포항의 제2 후판공장 증설에 이어 또 다른 승부수인 당진공장 후판 증설을 추진하면서 동국제강은 지난 9월 25일 일본 JFE스틸은 지분 교차보유 및 기술협력 협약을 체결했다. 후판생산 신규 설비를 도입하려면 JFE스틸의 설비 능력과 기술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JFE스틸의 협조를 구하기 위해 무려 1년 6개월동안 매달렸습니다. 하지만 일본측의 반응은 싸늘했습니다. 최악의 경우 또 다른 파트너를 물색하겠다고 생각했지 설비 투자 계획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동국제강과 일본 JFE스틸의 협력체제 구축이 성사되기 까지 장 전무가 전해준 후일담이다. '전략제휴확대 협정 조인식'날 바다 하지메 JFE스틸 사장은 "JFE스틸은 후판 생산에 관한 지식과 경험 모두들 동국제강에게 공개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전폭적으로 지지하겠다는 발표인 셈이다. 동국제강의 신중한 투자결정과 이를 구체화시켜가는 끈질긴 대외 설득노력은 브라질에 건설하고 있는 쎄아라 스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동국제강은 공장 건설을 위해 브라질 현지의 주 정부 및 중앙정부와 4년에 가까운 협상을 끌어왔다. 우선 오지나 다름없는 쎄아라주에 전기와 도로ㆍ철도ㆍ항만 등 주변 인프라 구축이 진행될 때 까지 착공을 미뤄왔다. 또 해외 투자에 대한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철광석 회사인 CVRD, 설비 회사인 이탈리아의 다니엘리, 유럽 현지의 금융권을 파이낸싱 파트너로 선택했다. 동국제강의 역할은 공장이 지어진 후 쇳물에서 슬래브를 만들어내는 압연 과정 뿐이다. 전체 자본금의 10%인 900억만 투자한다. 반면 동국제강은 연산 150만톤 규모의 슬래브중 최대 100만톤까지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는 효과를 누린다. 최소의 비용과 리스크로 최대의 효과를 끌어내는 셈이다. "철강 사업은 치밀함이 가장 중요합니다. 4년여의 긴 시간 동안 검토를 한 결과 비용은 줄이는 대신 몇 배 이상의 효과를 얻는데 만족합니다." 장세주 회장은 브라질서 열린 쎄아라스틸 착공식 후 임원들과 가진 자리에서 '치밀함'과 '끈질긴 근성'을 이 처럼 강조했다. 브라질 당진 공장 부지 매입과 쎄아라스틸ㆍ포항ㆍ당진 공장에 이르는 후판 생산 3각 벨트 구축에 20년이 걸린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