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절은 끝났다(Better days are over)."
21일 미국 캘리포니아 지역의 한 현대자동차 딜러점 사장은 서울경제신문과의 전화통화에서 일본 메이커의 약진에 대해 우려를 표하며 이같이 말했다. 일본 차의 부활로 끝이 어디인지 모를 정도로 승승장구하던 현대차의 기세도 이미 옛 일이 되고 말았다는 뜻이다.
미국 내 현대ㆍ기아차 딜러들은 올 초만 해도 물량만 넉넉히 받으면 얼마든지 팔 수 있다며 자신감을 내보였다. 그런데 그 좋았던 흐름도 금세 꺾였다. 가장 큰 이유는 일본. 온갖 악재를 극복하고 경쟁력을 회복한 일본 자동차 업계가 아베노믹스를 등에 업고 총력 마케팅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일본 차는 유럽에서도 판매를 늘리고 있고 중국에서도 반일감정을 뚫고 회복세를 나타내고 있다. 일본 차의 성장은 한국 차의 판매감소를 의미하며 이는 국익에 직결된 문제이기도 하다.
◇일본 차, 아베노믹스 탑재하고 전력질주=먼저 미국 시장을 보면 도요타는 올해 10월까지 전년동기 대비 8.1% 늘어난 186만7,155대를 판매했다. 시장점유율은 14.4%로 GM과 포드에 이어 3위다. 혼다 역시 전년보다 8.5% 늘어난 127만3,550대를 판매하며 시장점유율 9.8%로 크라이슬러에 이어 5위를 기록했다. 닛산은 지난해보다 9.1% 늘어난 103만2,134대를 팔아 시장점유율 8%로 6위다. 도요타ㆍ혼다ㆍ닛산은 미국 시장의 3분의1(시장점유율 합계 32.1%)을 차지하고 있으며 여기에 스바루ㆍ마쓰다ㆍ미쓰비시ㆍ스즈키 등까지 더하면 일본계의 미국 시장 점유율은 40%에 육박한다.
일본 차는 반일감정 때문에 맥을 못 추던 중국에서도 기지개를 켜고 있다. 중국 승용차 시장의 일본 차 점유율은 지난 2008년 30%에서 지난해 10월 7.6%까지 떨어졌다가 올해 10월에는 20%선을 회복했다.
일본 차가 세계 시장에서 다시 질주하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이른바 아베노믹스로 불리는 일본 정부의 수출 드라이브와 기업지원 정책이다. 엔저를 탑재한 일본 차는 세계 시장에서 수출경쟁력을 단번에 개선했고 이는 판매증가, 실적개선, 미래를 위한 투자라는 선순환으로 이어지고 있다.
실제로 올 들어 일본 자동차 기업들의 경영방향과 목표 자체가 달라졌다. 닛산은 현재 8%인 미국 시장 점유율을 오는 2016년까지 10%로 올리겠다고 밝혔다. 이는 무려 40만대를 확대하겠다는 뜻이다. 혼다는 스포츠카를 신규 개발해 '기술과 성능의 혼다' 이미지를 재건하기로 했으며 2008년 철수했던 포뮬러1(F1) 무대에 2015년 재진출해 그간의 침체 분위기를 일신할 계획이다.
◇일본 차와 경쟁 2라운드…전략은 있나=최근 수년간 한국 자동차가 일본 차에 맞서 눈부신 성과를 거둔 것은 품질과 디자인을 혁신했기 때문이다. 엄격한 품질관리와 디자인 경영으로 단기간에 폭발적인 소비자 반응을 이끌어냈다.
운도 따랐다. 2010년 도요타 230만대 리콜 사태에 이어 2011년 봄에는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나고 가을에는 주력 부품생산지인 태국에 대형 홍수가 났다. 추격 대상이던 일본 자동차 업계가 역사상 가장 큰 어려움을 겪은 시기, 때마침 품질과 디지인을 일신한 현대ㆍ기아차에 반사이익이 돌아왔다. 그러나 일본 차 업계가 정부 정책지원을 연료로 삼아 무섭게 재질주하는 올해부터는 경쟁이 2라운드로 접어들었다.
가장 큰 문제는 자동차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국가적 전략이 없다는 점이다. 자동차에는 2만~4만개의 부품이 들어간다. 전후방산업에 대한 파급효과가 가장 큰 업종이 바로 자동차다. 게다가 현대ㆍ기아차의 부품 국산화율은 98% 수준이어서 차 한 대를 수출하면 이익이 고스란히 한국에 돌아온다.
그럼에도 자동차 업계는 사회 전반의 반기업정서와 강성노조의 무리한 주장 등에 둘러싸여 신음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 때문에 현대ㆍ기아차는 현재 50% 이상인 해외생산 비중을 더 높이겠다고 밝혔지만 이를 만류할 만한 명분이 없는 게 현실이다.
자동차 업계의 한 고위관계자는 "국내 자동차 업계는 올 들어 중대한 환경변화를 맞았다"면서 "슬기롭게 대응하지 못할 경우 세계 5위 자동차 생산국의 위치를 놓치게 될지 모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