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투·투자자 회면속 살아남기 급급경기도 기흥에서 반도체 부품을 생산하는 T사. 한창 일을 하고 있어야 할 오후 2시가 돼도 직원들이 회사 앞에서 담배를 피우며 잡담을 나누고 있는 모습이다.
이 회사는 설립된 지 불과 2년밖에 안됐지만 경기가 사상 최악이었다는 지난 해에도 종업원 12명과 함께 미래를 기약했던 곳이다.
하지만 올해는 전혀 사정이 다르다. 직원은 7명으로 줄었고 하는 일도 이전까지와는 상관없는 컨덴서 등의 유통, 판매만을 하고 있을 뿐이다.
"기약이 없어요. 더 이상 견디기는 힘들지만 죽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살아남기 위해서 무엇이든 할 생각입니다" L사장의 말이다.
한때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극복의 일등공신' '경제의 새로운 축' '새로운 성장엔진' 등 화려한 수식어를 몰고 다녔던 벤처가 이제는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다.
증가 일로에 있던 벤처기업이 계속 감소하고 있고 연구개발의 손길도 멈춰졌다. '미래가 보이면 일을 하겠는데 그게 안 보인다'는 게 그 사유다.
◇격감하는 벤처기업
벤처의 이탈현상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벤처확인업체의 지속적인 감소세. 지난 4월말 현재 벤처기업수는 지난해 말에 비해 800여개 이상 줄어든 1만739개에 그쳤다.
문제는 이러한 수적 감소가 지금까지 단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IMF 한파가 절정에 달했던 지난 98, 99년은 물론, 지난해에도 벤처확인 업체수는 월평균 200개 이상 증가세를 보였다. 하지만 올 들어서는 증가는 커녕 오히려 감소폭이 커지는 추세를 나타내고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벤처기업 확인이 만료된 기업중에 재확인을 신청한 업체가 예년에 비해 턱없이 적다는 점이다.
보통 확인기간이 만료된 업체는 약2~3개월 후면 재신청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연말에 벤처기업 수가 이전달과 비슷한 수준을 보였다가 연초에 다시 늘어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다. 하지만 올해는 이런 현상이 없어졌다.
이렇듯 제도권에서 이탈하는 벤처기업이 늘어난 것은 무엇보다도 '벤처'가 더 이상 기업을 이끌어 나가는 데 도움이 안 된다는 인식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은 현장에 가면 그대로 느껴진다. 경기도 분당에 있는 A사. 2000년 6월에 벤처기업으로 확인을 받은 이 업체는 조만간 재확인을 신청해야 하지만 그냥 포기할 생각이다.
앞으로 창투사로부터의 투자유치를 감안하면 벤처라는 직함을 그대로 유지하는 게 좋겠지만 요즘처럼 벤처캐피털이 꿈쩍도 안하는 상황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게 회사측 판단이다.
◇연구개발보다는 매출
벤처기업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연구개발을 위해 머리를 싸매고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요즘은 이런 광경을 보기가 쉽지 않다.
상당수 기업들이 연구개발보다는 판매와 마케팅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지난 해부터 인빌딩(In-Building) 시스템을 연구하던 S사는 최근 외국의 솔루션을 들여와 판매하는 유통회사로 성격을 바꿨다.
1, 2팀으로 나뉘어 있던 개발팀은 개발기획팀으로 이름을 바꾸고 사무업무까지 함께 하지만 인력은 절반 가까이 줄었다. 인빌딩 시스템에 대한 연구는 내년 하반기 이후로 미뤄놓은 상태다.
연구개발비도 대폭 삭감된 상태. 사무기기를 생산하는 P사는 지난해 10억원이 넘는 돈을 개발비에 쏟아 부었지만 올해는 2억원도 채 안되는 금액만을 책정한 상태다.
그나마도 부담이 된다는 판단에서 최근에는 5,000만원을 줄였다. 인건비를 제외하면 실제로 연구개발에 들어가는 돈은 거의 없는 셈이다.
◇투자가 없다
벤처가 가장 어려움을 겪는 분야가 바로 자금. 벤처캐피털이나 기업으로부터 투자를 받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보다 더 어렵다는 게 업계의 설명이다.
그러다 보니 자금을 확보하고 있는 기업도 투자보다는 현금 또는 부동산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2000년에 창투사로부터 약 50억원 가량의 투자를 받았던 소프트웨어업체 F사는 구입한지 1년밖에 안된 건물을 팔고 조만간 서울 청담동에 새 사옥을 구입, 사무실을 이전할 계획이다.
관련업체에서 투자를 해 달라고 요청을 했지만 그런 일은 절대 없으리라는 게 L사장의 주장이다.
이밖에 지난해 초 15억원의 투자를 받았던 D사도 일체의 투자활동을 검토치 않기로 결정하고 내부 유보금을 확보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벤처캐피털도 휘청
벤처캐피털도 벤처를 외면하기는 마찬가지. 대부분의 메이저 벤처캐피털들은 올해 최대의 투자처를 벤처기업 보다는 기업구조조정 시장에 두고 있다.
반면 올초 사업계획을 세울 때까지만 해도 지난해보다 최고 50%까지 늘어날 것이라고 호언했던 투자 역시 5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지난 해와 비슷한 수준에 머무르고 있을 뿐 지금까지 확대할 생각을 않고 있다.
문을 닫는 창투사도 올해 들어 크게 늘어나는 추세다. 이미 지난해 말보다 창투사의 숫자가 5개 이상 줄어들었다.
특히 문을 열어놓고 있지만 실제로는 영업활동을 하지 않는 중소 창투사는 그 숫자가 수십개에 달할 것이라는 게 업계 관계자의 전언이다.
M&A 시장에 나온 창투사 매물도 지난해 7~8개에서 현재는 15개 이상으로 두 배 이상 증가했다는 게 부티크들의 설명이다.
해외 투자자 역시 기피 현상을 보이기는 마찬가지. 코스닥 시장이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투자보다는 관망세로 일관하고 있다.
T사가 지난 해부터 발행키로 했던 1,000만달러 규모의 해외 신주인수권부사채(BW)를 발행치 못한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벤처정책 부재가 화 불러
전문가들은 벤처 위기의 가장 큰 원인을 벤처정책의 부재에서 찾고 있다. 지난 2월말 '벤처산업 건전화 방안'이 발표되기는 했지만 모든 문제를 '일부' 벤처기업의 책임으로 돌린 면피성 대책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모 국책연구소의 한 연구위원은 "벤처기업은 정부에서 다 죽인 것이나 다름없다"고 지적하고 "이제 벤처가 소생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고 단언했다.
그는 또 "이미 대안을 세우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전제하고 "다만 코스닥시장 개편, 자금ㆍ기술 지원제도의 전면적 개선, 창투사 출자사업의 축소 등이 이루어진다면 아직까지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고 강조했다.
G컨설팅사의 한 컨설턴트는 "벤처정책이 방향을 잃고 갈 길을 제시하지 못하면서 벤처기업들이 무더기로 혼란에 빠지고 있다"고 지적하고 "무엇보다도 빨리 '벤처'의 대안, 또는 발전방안을 제시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송영규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