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흑은 53으로 틀어막았다. 검토실에서 예상한 그대로였다. 여기서 이세돌이 하염없는 장고에 빠졌다. "갈등을 하고 있는 겁니다. 패를 하기는 해야 되는데 백에게 결정적인 팻감이 없거든요. 이세돌이 속으로 후회를 하고 있을 겁니다."(윤현석) 먼저 칼을 뽑은 쪽이 이세돌이었다. 그가 칼을 뽑으면 대게의 상대는 일단 가슴이 철렁한다. 소문난 고수들이 그의 필살기에 얼마나 처참하게 무너졌던가. 그러나 오늘은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다. 구리의 손은 박력있게 쑥쑥 나오는데 이세돌의 손이 얼어붙었다. "칼을 뽑은 것 자체는 나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펼친 검법의 디테일에 약간 문제가 있었어요. 오늘 이세돌의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은 모양입니다."(홍민표) 홍민표가 참고도1을 타이젬에 올렸다. 정면승부를 하는 경우의 가상도였다. 백13 이후의 진행은 너무 복잡하므로 생략하거니와 흑은 좌변을 내주고 A와 B를 연타하는 바둑이 될 것인데 흑이 아무 불만이 없다는 설명이 붙었다. "이 길이 불리하다면 백은 겸손하게 꼬리를 내리고 목숨을 구걸해야 합니다."(홍민표) 홍민표가 참고도2의 백1로 물러서는 가상도를 올렸다. 굴복을 하면 사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다. 그러나 이 코스는 흑이 외세가 워낙 두터워서 무조건 백의 불만이다. 애초에 서슬 퍼렇게 칼을 뽑았던 그 기세는 찾아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장고 12분만에 이세돌의 백54가 놓였다. "정면승부로 가는 군요. 하긴 이세돌의 사전에 굴복은 없지요."(윤현석) 구리의 흑67이 아주 좋은 수였다. 여기서 이세돌은 백58 이하 64로 외곽싸바르기로 나갔다. "버리고 둘 심산이군요. 하긴 그게 현명한 작전입니다."(윤현석) 정면승부도 안되고 굴복도 싫을때 고수가 선택하는 길이 이것이다. 버리고 두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