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늙은 말이 있다. 온 몸에는 점이 잡힌 잡종말에다 거세까지 당해 힘겹게 산 흔적이 역력하다. 그의 이름은 ‘홀스또메르.’ 마굿간에는 언제나 혈기 왕성하고 싱싱할 것만 같은 젊은 말들이 “늙은 것은 좋지 않지. 앞으로 전진할 수 없는 말은 쓸모없는 불구자. 불구는 잘못이야” 라며 홀스또메르를 괴롭힌다. 어느 누구인들 늙고 싶겠는가.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을 홀스또메르는 이야기 한다. 죽음을 앞두면 누구나 과거를 회상하는 법. 신의 창조물이었지만 인간들과 동료들에게 버림받을 수 밖에 없었던 자신의 삶을 되돌아본다. 그는 순종 부모 사이에 얼룩배기 잡종으로 태어났다. 잡종이라는 이유로 사랑에서 버림받고, 거세당하며, 자유를 박탈당한다. 홀스또메르는 “개인소유권은 저급한 인간의 본능. 내 집이라고 하면서 거기 살지 않고, 내 마누라라고 하면서 다른 여자와 사는 사람들”이라며 인간들의 오만과 잘못된 소유욕을 향해 일갈한다. 추락만 계속될 것 같던 그의 삶에도 한 자락 희망이 비친다. 남들은 다 외면하는 그의 얼룩무늬를 경마장의 세르꼽스키 공작은 “얼룩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화려하다”는 찬사를 한다. ‘보폭이 크고 빠른 말’이라는 홀스또메르의 진가를 알아본 것이다. 공작과 함께 한 시간동안 그는 질주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며 당당한 자신의 모습을 찾게 된다. 하지만 행복한 순간도 잠시, 애인을 빼앗긴 공작은 그를 학대해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힌다. 결국 아름답던 홀스또메르는 혹사당하고 팔려 다니면서 초라한 모습으로 마지막 거처로 돌아오게 된다. 극단 유의 10주년 기념 작인 ‘어느 말(馬)의 이야기-홀스또메르’가 막을 올렸다. 97년 국내 초연이후 네번째로 관객들과 만났다. 마르크 로조프스키가 각색한 톨스토이 원작인 이 작품은 늙음과 젊음, 삶과 죽음, 사랑과 고통 등을 역설적으로 대비하며 한 늙은 말의 회상을 통해 욕심으로 가득 찬 인간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한다. 털 묶음 하나로 말이 됐던 배우들의 사실적인 연기에 무대는 금방이라도 말떼가 튀어나올 듯한 마굿간으로 변했다. 예전보다 커진 무대에 배우들이 늘어나 더욱 활기찬 군무를 선 보였다. 아코디언을 포함한 라이브 음악은 홀스또메르의 쓰라린 삶을 담아냈다. 서울 문화재단 대표를 맡아 오랫동안 무대에 오르지 못한 유인촌이 이번에도 홀스또메르 역을 맡아 두시간 내내 녹슬지 않은 관록의 에너지를 뿜어냈다. 배우는 무대에 섰을 때 빛난다는 말을 확인이라도 시키려는 듯 그의 연기는 무대를 가득 메웠다. 젊었을 때는 힘이 솟구치는 화려한 홀스또메르였고, 병든 채 마굿간 구석에 서 있을 때는 금방이라도 벼룩이 떨어질 듯 초췌한 모습이었다. 18일까지 예술의전당 토월극장. (02)515-05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