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Story] 문철상 신협중앙회장

아버지 같은 신부님 권유로 시작한 신협, 그 분 뜻 거스르며 키워냈죠



"유명무실한 성당 신협 살려봐라" 부탁 받고

당시 고액 봉급 받던 직장 떠나 들어왔지만

"신자 아닌 군산 시민 위한 신협 돼야죠" 설득

외부에 개방 3년만에 자산 150억으로 불려

신부님 후원 덕 국내 첫 신협주제 논문도 써

불법대출 계기 지역본부 돌며 건전경영 당부

신협 카운티 조성·협동조합 성공에도 힘쓸 것


"'철상이 너 성당 밖으로 신협 가지고 나가서 키우려고 하지? 신협은 성당 내에서 신자들끼리 조그맣게 하는 것이지 키우는 게 아니야.' 신부님의 그 생각을 돌리느라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저는 '신협은 가톨릭의 것이 아닙니다. 신자뿐 아니라 군산 시민을 위해 신협을 놓아주십시오'라고 주장했죠. 결국 신부님은 저를 이해해주셨어요. 우리나라 최초로 신협을 주제로 한 석사논문을 쓸 수 있었던 것도 '공부를 더 하라'며 대학원에 보내주신 신부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5일 대전시 둔촌동 신협중앙회에서 만난 문철상(사진) 신협중앙회장은 신협과의 첫 인연을 '순명(順命·천명에 복종함)'이라고 표현했다. 지금으로부터 33년 전 지역 우량기업인 경성고무 개발과 주임으로 일하던 문 회장은 자신이 청년회장으로 있던 군산 둔율동성당의 안복진 신부에게 유명무실한 성당 신협을 살려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대졸 초임이 10만원이던 당시 12만원이라는 높은 봉급을 받던 그는 그 길로 직장을 버리고 신협에 첫발을 들였다.

"당시 군산에서는 우리 성당이 가장 큰 곳이었기 때문에 변호사며 의사며 부자들이 많았어요. 성당에서 행사를 하면 간부를 맡고 있던 내가 부자 명단을 만들어 한 50군데씩 돌아다니며 지원 좀 해달라고 설득했죠. 신협 일도 마찬가지로 무작정 그분들을 찾아가 믿고 맡겨달라고만 했어요. 어떤 때는 신협 망해도 개인 돈으로 갚아주겠다고 큰소리 쳐가면서. 들어갈 때 1억8,000만원이었던 자산이 그렇게 3년 만에 50억원이 됐습니다."

신협 조합원을 유치하기 위해 각종 사회활동에도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라이온스클럽 최연소 회장과 사진작가협회 최연소 지부장 타이틀도 이때 얻었다.

문제는 성당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신협을 더 이상 키우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순명에 따라 신협과 연을 맺은 문 회장은 이번에는 아버지와 같던 신부님의 뜻을 거역해야 했다. "신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군산 시민을 위한 것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말에 신부님이 져주셨지요. 그러고 나서는 공부를 하라고 말씀하셨어요. 본인이 다 알아봤는데 중앙대 사회개발대학원이 신협 정신과 딱 맞는다면서 거길 꼭 가라고 하시더라고요."

'우리나라 사회발전의 저해 요인에 대해 논하라'는 문제에 시험지 앞뒤로 빼곡하게 답을 써내고 합격이 됐다. 하지만 현직 임원으로서 서울 학교에 다니는 데 대해 이사회에서 문제를 제기했고 결국 전주대 야간대학원을 졸업했다. 이때 석사논문으로 쓴 '신협 조직의 목표와 조합원 욕구의 통합방안에 관한 연구'는 우리나라 신협 석사 논문으로는 처음이다. 문 회장은 "아직도 신협에 대한 순수한 연구는 그리 많지 않다"며 "그래서 우리 직원들한테 석박사에 도전하라고 이번 시무식에도 이야기했다"고 말했다.

그 사이 그가 이끄는 신협은 승승장구했다.

신협을 성당에서 끌어낸 지 3년 만에 자산이 150억원으로 늘었고 군산대건신협 건물을 지었다.

지난 2010년에는 드디어 신협에 들어올 때 결심했던 신협중앙회장 선거에 나섰다. 하지만 결과는 낙마였다. 설상가상으로 법적으로 두 번 밖에 못하게 돼 있는 이사장직에서도 물러나야 했다. 개인사업을 하다 전북신용보증재단 이사장에 취임하면서 무너진 마음을 다잡았다. "중앙회장에 떨어지고 나서 3개월간 '멘붕'에 빠졌어요. 나는 내가 무조건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돌이켜보니 아차 싶었어요. 선거운동 때 대의원들을 만나면 내가 얼마나 이 조직을 사랑하는지 이런 것을 얘기만 하고 대의원들이 원하는 것은 듣지 않았던 거예요. 그래서 20%만 얘기하고 80%는 듣자. 이렇게 전략을 세웠어요. 아내와 함께 선거운동을 하는데 아내한테 '내가 열정적으로 말하려고 하면 내 허벅지를 꼬집으라'고 했습니다. 대의원들이 얘기하면 저는 그저 '맞습니다' '좋은 의견입니다'라고 이야기하고 아내는 그 내용을 수첩에 전부 적었어요. 정견발표날 그 수첩을 꺼내면서 '이걸 참고 삼아 일하겠다'고 했어요. 그게 히트를 했죠."

그는 지금도 여전히 수첩을 들고 현장을 돌아다닌다. "당선되고 나서 사회공헌재단을 만드는 것부터 선도조합을 통해 다른 조합을 컨설팅해주는 프로그램까지 새로 추진하면서 실무책임자나 이사장들이 모이는 데는 어디든지 다 찾아갔어요. 한 달에 1만2,000㎞씩 뛰니까 차가 고장 나 중간에 한번 바꿔야 할 정도였죠. 현장에서 들은 내용은 다 메모해서 각 부서에 전달해요. 부서별로 메모를 나눠주고 피드백도 해드립니다."

그런 문 회장이 최근 조합을 돌아다니며 입이 아프게 강조하는 것이 바로 '부끄러움'이다.

문 회장은 최근 경남 김해시 신협이 사기범에게 수입 승용차와 현금을 받고 무려 566억원을 불법대출해준 일에 관해 "신협을 믿고 계신 많은 고객께 고개 숙여 사과드린다"며 "올 한해 건전경영을 제1목표로 삼고 지역본부와 조합을 돌아다니며 '부끄러움'의 경영을 해줄 것을 간곡히 당부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중앙회 차원에서도 건전성과 신뢰를 최상위 목표로 두고 전문 감독역을 추가 배치하는 등 내부 시스템을 단단히 통제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평생을 신협인으로 살아온 그에게 앞으로의 신협에 대해 물었다. 문 회장은 "문철상은 신협 조직에 변혁을 가져왔고 그가 있어 한국 신협이 미래를 준비할 수 있었다는 평가를 받고 싶다"고 답했다. 그래서 요새 그가 몰두하는 문제가 바로 신협의 미래다. 신협은 이미 저개발국가를 대상으로 신협운동을 퍼뜨리는 작업을 시작했다. 첫 대상이 몽골이다. "제가 아는 수녀님이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 빈민가에서 유치원을 하고 있어요. 찾아갈 기회가 있어 가봤더니 너무 형편없는 거예요. 이런 곳에 신협을 세워줘야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리고 현장조사를 하는데 몽골에도 신협이 148개나 있어요. 근데 금리를 21.5%나 받더라고요. 이미 몽골 친구들 두 명을 한국에서 유학시키고 우리 연수원에서 교육시켜 몽골로 돌려보냈어요. 그 친구들이 한국형 신협을 몽골에 전파하는 씨앗이 될 겁니다."

좀 더 먼 미래에 관한 고민도 있다.

"한국 신협운동의 미래라는 책을 쓰고 있어요. 올해 말이나 늦어도 내년까지는 내고 싶어요. 골자는 두 가집니다. 하나는 20만평 정도 되는 부지에 신협 카운티를 만드는 거예요. 신협대학은 물론 신협 지도자들의 묘소도 들어가고. 또 지친 현대인들이 언제든지 와서 쉴 수 있는 수련원 같은 것도 만들고요. 또 하나는 협동조합 간 협동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요새 협동조합이 대안이라고들 하는데 전국 6,800여개 협동조합 가운데 성공률은 10%도 안 될 거예요. 따로따로 떨어져 고군분투하지 말고 보건복지부 산하에 협동조합청을 하나 만들어 협동조합끼리 협동하자는 거죠. 지금 당장은 어렵겠지만 이뤄진다면 신협이 쌓아온 협동조합의 노하우와 역사는 그때서야 비로소 꽃을 피울 수 있을 것입니다."

사진=이호재기자

●문철상 회장은




△1951년 전북 김제 △1977년 서해대 미술학과 졸업 △1990년 전주대 경영학석사 △2002 군산대건신협 상임이사장 △2004 전라북도 신협협의회장 △2009년 신협중앙회 이사 △2011년 전북신용보증재단 이사장 △2011년 군산대 경영학박사 △2014년~ 신협중앙회장 △2015년 세계신협협의회(WOCCU) 제1부회장



김소월 작품 낭송하던 중학생 50년만에 '문청의 꿈' 이루다


4년전 등단… 첫 시집 '싸락눈' 출간
"詩作은 딱딱한 금융인의 삶 위로해줘"

박윤선 기자




까까머리 중학생이었던 문철상 신협중앙회장은 국어 선생님의 "글 잘 쓴다"는 칭찬을 듣고 시에 관심을 갖게 됐다. 시인이 되고 싶다는 마음에 불을 지른 것은 수업시간에 배운 김소월의 '진달래 꽃'이었다. 소월의 시에 반한 그는 시집 '진달래 꽃'을 구해다 옆구리에 끼고 다니며 친구들 앞에서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하고 낭송하곤 했다.

어린 시절의 꿈을 이룬 것은 50여년이 지난 4년 전이다.

계간문예에서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그는 지난해 20대부터 써온 시 100편 가운데 36편을 추려 '싸락눈'이라는 제목으로 첫 시집을 출간했다. 이번 시집에는 그에게 시인의 꿈을 심어준 소월 시와 같은 제목의 '진달래 꽃'이 수록돼 있다. 문 회장은 "돌아보니 인생의 구비구비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한 작품씩 탄생한 것 같다"며 "나에게 시작(詩作)은 어려운 현실 속에서 삶의 원동력을 만드는 치유와 담금질"이라고 말했다. 중앙회장 선거에서 떨어졌을 때 막막했던 그를 붙잡은 것 역시 시다. 딱딱한 금융인으로서의 삶을 위로해준 것도 시였다.

"낙마 후 혼자 제주도로 가서 열흘을 있었어요. 차를 타고 움직이며 차창가에 움직이는 풍경들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고 시를 썼죠. 항상 외롭고 쓸쓸하고 막힌 느낌을 받을 때 글이 써지더라고요."

그는 50년간 마르지 않은 창작열의 발원지로 '독서'를 꼽았다. "젊은 시절 부모님 몰래 일본에 가서 대학을 다니던 아버지가 폐결핵을 얻어 돌아오셨지요. 그때 아버지가 가지고 온 어마어마한 짐이 다 책이었어요. 톨스토이 인생독본 같은 세계 명작들이었는데 번역이 엉망이어서 주인공이 '왈(曰)'하는 옛날식 표현으로 점철돼 있었지만 저에게는 보물 같았죠."

아버지의 서재가 있던 공장에 화재가 나 책들은 한순간에 잿더미가 됐다. 경제적 어려움 까지 겹치면서 고등학생이었던 그는 한동안 방황했고 대학에 들어가느라 삼수를 했고 서울 계동의 외가에서 더부살이를 하게 됐다. "먼지도 많고 퀴퀴한 서재 방이 하나 있었는데 명문학교에 진학한 외가 6남매와 외가어른들이 보던 책이 다 거기 있었어요. 그걸 재수할 때 싹 읽어버렸지요. 전기세 많이 나온다는 외숙모의 타박에 몰래 전깃줄을 끌어다가 그 끝에 전등을 달아 이불 속에서 불을 켜고 책을 읽었어요." 그는 "만화책이라도 좋으니 무조건 책을 많이 읽고 정독하는 것을 추천한다"며 "그저 읽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창조적 아이디어가 샘 솟는 사람이 돼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