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유엔시대

이번 이라크 전쟁은 몇 가지 측면에서 과거의 전쟁과 구별되는 차별성을 가지고 있다. 우선, 등화관제가 사라진 전쟁이라는 점이다. 폭격이 진행되는 인구 500만명의 고대도시 바그다드는 마치 평상시처럼 환한 가로등이 거리를 밝히고 있다. 인공위성을 이용한 최첨단 무기의 가공할 파괴력과 고도의 정밀성은 더 이상 어둠이 안전을 위한 방패막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피할 곳도, 숨을 곳도 없는 전방위 전쟁이 현실화 되고 있는 것이다. 둘째, 전장의 생생한 모습이 TV를 통해 생중계된다는 점이다. 사선을 두려워하지 않는 종군기자들의 활약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TV 화면 속에서 전개되는 전장의 모습이 현실인지 영화인지 분간이 안갈 정도로 전쟁의 전 과정이 TV로 생중계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그러나 이번 전쟁이 과거의 전쟁과 다른 가장 큰 차별성은 `포스트 UN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전쟁이라는 점이다. 미국의 선전포고 과정을 보면서 윌리엄 사파이어 등 외국의 칼럼리스트들은 `안보리 이후 시대(post-Security Council)`의 도래라고 평가한 바 있다. `이라크 결의안` 거부권 선언 등 UN 안보리 상임이사국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힌 미국은 UN 안보리의 결의 없이도 전쟁을 강행할 수 있다는 것을 국제사회에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미국이 공격을 당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본토수호`, `테러차단`, `대량 살상무기 해체`. `세계자유 수호`라는 명분 하에서 언제든지 선제공격에 나서는 전쟁을 벌일 수 있다는 전례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UN 안보리 5대 상임이사국 중 프랑스, 러시아, 중국 3개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감행된 이번 전쟁에 대해서 외국의 주요 언론들은 `21세기 새로운 로마제국`이 탄생할지도 모른다고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만약 이라크 전쟁이 속전속결로 끝날 경우 전쟁승리의 자심감을 토대로 국제문제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개입이 예상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번 이라크 전쟁은 우리에게 남다른 의미가 있다. 이라크 전쟁 이후 미국의 관심은 수개월째 계속되고 있는 북한의 핵문제에 집중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미국이 이라크전을 조기에 매듭짓는다고 해서 한반도 위기가 반드시 고조되는 것은 아니다. 협상을 통한 외교적 해결 가능성은 얼마든지 열려 있다. 그러나 `한반도에 전쟁은 없다`고 안일하게 대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포스트 UN 시대에는 그 누구도 한반도의 안전과 평화를 보장해 준다고 자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제질서의 전환기를 슬기롭게 해결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질서에 맞는 새로운 형태의 외교전략이 절실하다. 군사적 동맹을 통한 전통적인 우방관계 구축은 물론, 상호간 신뢰와 이익을 바탕으로 한 입체적인 다자외교의 실현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박진(국회의원ㆍ한나라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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