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41돌] 아픔딛고 부활한 '경제 조타수'

아픔딛고 부활한 '경제 조타수'2001년 8월 1일 창간 41주년을 맞이한 서울경제신문의 감회는 그 어느 때 보다 남다르다. 한국일보 자매지로 출발했던 서울경제가 홀로서기라는 독자적인 행보를 시작한지 1년 여가 되어가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독립경영체제로 독자들을 찾아가는 서울경제는 반세기 가까운 세월 동안 늘 그래왔던 것처럼 한국경제의 조타수 역을 자임하고 있다. 1960년 8월1일 국내 최초의 경제신문인 서울경제의 창간은 전쟁의 폐허를 딛고 경제 번영을 일군 '한강의 기적'의 장엄한 서곡이었다. 당시는 당장 먹고 사는게 문제였던 시절, 대다수 국민들이 아직 경제가 뭔지 관심조차 가질 여유가 없었던 상황이었다. 이 때 '경제'와 '번영'이라는 화두를 국민에게 던져 "우리도 잘 살수 있다"는 희망을 갖도록 의욕과 용기를 심어준 서울경제신문의 출현은 분명 우리 민족의 행운이었다. >>관련기사- - - - - - - - - - - - - - - - - - - - - - - - - - 이후 '경제 교과서'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국민들의 애정과 관심을 독차지해왔던 서울경제는 경제지 대중화 시대를 수 십년을 앞당긴 선구자 노릇을 맡아왔다. 그러나 1980년 신군부의 등장은 서울경제와 독자들에게 뜻하지 않은 비극을 몰고 왔다. 군사정권은 권력의 위세에 굴하지 않고 정론만을 고집하는 서울경제에 재갈을 물리기 위해 '강제 폐간'이라는 폭거를 저질렀다. 하지만 서울경제는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섰다. 1988년 8월 1일 '정론의 기치'를 들고 복간한 서울경제는 "국민경제의 양심적인 파수꾼이 되겠습니다"라는 다짐과 함께 독자 앞에 돌아왔다. 뉴 밀레니엄을 맞은 21세기의 국민적 과제는 단연 민족의 통일이다. 서울경제는 창간 40돌을 맞은 지난 2000년 1월 1일 새 천년 첫 날 '통일경제 신문'을 표방하면서 화합과 번영의 새 시대를 열어나갈 새 시대의 기수가 되겠다고 약속했다. ▲ 한강의 기적을 선도하다(60~80년) 서울경제신문의 창간은 1960년이지만, 태동은 그 보다 훨씬 전인 194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창간발행인 고 장기영 사주는 1950년대 전쟁이 휩쓸고 간 폐허 속에서 나라 경제를 다시 일으킬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유수한 인사들과 함께 '서울 경제연구회'를 창립했다. 당시 장 발행인 등은 서울이 나라의 중심이므로, 서울이 먼저 일어서야 전체 나라경제가 일어선다는 생각에서 연구회 이름을 정했다. 그 뜻이 고스란히 신문의 제호에 담겨 우리나라 최초의 경제신문의 이름이 서울경제신문으로 결정된 것이다. '경제 재건''위기극복'의 염원은 지면에서 그대로 살아났다. 1960~70년대 서울경제는 '수출입국''경제계획''개발''성장''번영'의 기사와 관련 제목들이 거의 날마다 지면을 가득 메웠고, 당시 독자들은 희망에 넘쳤고 '하면 된다'는 자신감으로 충만해졌다. 경제저널리즘의 개척자인 서울경제의 유년기와 청년기는 개혁의 연속이었다. 우선 1969년 주 24면에서 주 36면으로, 1974년 주 36면에서 48면으로 각각 늘린 서울경제는 이어 1975년 증권기사를 대폭 확대하는 한편 부동산 정보란 신설하는 혁신을 단행했다. 또한 1978년 8월 1일에는 서울경제신문 미주판을 뉴욕에서 발행했으며, 1980년 8월 1일에는 전인미답의 10만 고정 독자 돌파의 위업을 이뤘다. ▲ 강제 폐간 아픔을 딛고 다시 서다(80~99년) 지난 1980년의 언론 통폐합은 우리 언론사에 씻을 수 없는 오욕이다. 총 칼을 앞세워 정권을 탈취한 신군부는 불법적으로 서울경제신문을 강제폐간시켰다. '건전언론육성방안'이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정론만을 고집하면서 사사건건 정권의 잘못을 비판하고 나섰던게 서울경제 폐간의 빌미가 됐다. 군사정권은 1980년 11월 12일 경영주 고 장강재 회장을 국군보안부대로 연행, 무장군인들에 의한 공포분위기 아래서 서울경제신문에 대한 포기각서를 받아냈고, 경제신문의 효시 서울경제는 같은 해 11월 25일 지령 6,390호로 강제폐간되는 비운을 맞았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했던가. 신군부의 폭거로 침묵을 강요당했던 서울경제가 1988년 8월 1일 복간했다. 지령 6391호로 복간한 서울경제의 "국민경제의 양심적 파수꾼이 되겠다"는 다짐은 군부독재 정치의 오랜 폭압에서 빠져나온 국민 모두에게 희망의 메시지로 들렸다. 장년기에 들어선 복간 서울경제의 발걸음은 창간 초기 못지 않게 힘차고 늠름했다. 1989년 2월 주식회사 서울경제신문 별도법인 설립, 성장의 틀을 마련한 서울경제는 1990년 경제지 중 최초로 월요일자 발행함으로써 '국내 최초'의 전통을 이어갔다. 제작시스템의 선진화도 남보다 한 걸음 앞서는 적극성으로 보였다. 1994년 5월 1일 신문제작체제를 완전자동화했으며, 1998년 1월21일에는 전격적으로 세로쓰기에서 가로쓰기 방식으로 전환했다. 서울경제는 1999년 6월 12일 경제지로서는 아무도 오르지 못한 '지령 10,000호 발행'의 고지에 섰다. 같은 해 10월 1일에는 미국 LA타임즈 자매지 골프매거진 한국판 발행, 종합 미디어 그룹으로 성장해 나갈 발판을 놓았다. ▲ 통일 시대 이끌 '통일 경제신문' 선언(2000년~현재) 2000년은 여러모로 뜻 깊은 한 해였다. 서울경제는 창간 40돌을 맞으면서 '불혹(不惑)' 장년기에 들어섰고, 새 천년을 맞는 국민들은 새 희망과 새로운 사회적 지향점을 열망했다. 이 때 서울경제는 2000년 1월 1일 새 천년 첫 날 신문에서 '통일경제 신문'표방하면서 국민적 요구에 부응했다. 이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장년기에 들어선 서울경제가 당연히 떠맡아야 할 소임이며, 성장기엔 경제 발전의 조타수로 국난기에는 희망의 새 기운을 불어넣는 전령사로 국민과 함께 해 왔던 서울경제신문의 사명이기도 하다. 서울경제는 2000년 4월 18일 종합경제 주간지 이코노믹 리뷰(Economic Review)를, 5월 25일에는 미국 최고의 과학 월간지 포퓰러 사이언스(Popular Science) 한국어판 발행, 독자에게 더욱 친근한 모습으로 다가갔다. 서울경제의 2000년은 '독립 경영'의 닻을 올린 첫 해이다. 8월 1일 창간40주년 기념식은 김대중 대통령을 비롯한 국내 지도층 인사 수 백명이 하객으로 찾았던 대성황을 이뤘다. 이 날 서울경제는 '발전적인 분사'를 선언하고, 10월 1일 한국일보와 공식적으로 분사했다. 문성진기자 <사진설명> 세계 2위봉인 K2(8,611m)정상에 우뚝 선 서울경제와 박영석 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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