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절망의 삶 끝에… 그래도 희망이

이창동 감독
남편 잃은 여인, 아이마저 하늘로… 전도연 한층 완숙한 연기 뿜어내


삶이 아무리 처절할 지라도 햇살은 늘 우리 곁을 비춘다. 어떤 어둠 속에서도 작은 희망이 남아있다는 사실. 그것이야말로 삶이 만들어낸 마지막 진리가 아닐까. 올해 칸 영화제 경쟁부문 진출작인 이창동 감독의 '밀양'은 처절한 불행을 겪는 한 여인의 삶을 통해 이런 삶의 진리를 표현한 영화다. 안전한 해피엔딩을 앞세우는 대신 고통의 근원까지 깊숙이 들어가기를 주저하지 않는 이 작품은 최근 점점 상업화 돼가며 방향성을 잃어가고 있는 한국영화계에서 오랜 만에 만나는 진실하면서도 절절한 영화다. 원래 전작 '오아시스' 개봉 직후부터 기획되기 시작한 영화는 이창동 감독의 장관 임용으로 정말 오랜 시간 감독의 머리 속에만 묵혀 있었다. 하지만 묵은 장이 깊은 맛을 내듯 오랜 시간 기다려온 이 영화의 깊이는 그래서 더 남다르다. 영화의 주인공은 남편과 사별하고 아이를 혼자 키우는 젊은 여인 신애(전도연). '아이는 흙을 밟고 살아야 한다'는 죽은 남편의 지론을 실천하기 위해 신애는 아들 준을 데리고 남편의 고향 밀양으로 떠난다. 한껏 희망을 안고. 그렇게 밀양에서의 삶을 시작한 신애. 처음엔 사람들의 텃세에 고생도 했지만, 자신의 주변을 뱅뱅 맴도는 밉지 않은 노총각 카센터 사장 종찬(송강호)의 도움으로 조금씩 적응해 나간다. 그러던 중 상상할 수 없는 불행이 신애에게 닥친다. 아들 준이 유괴 살해된 것. 그녀에게 하나 밖에 없는 삶의 희망이 사라진 그녀는 처절히 무너진다. 그러던 중 신애는 우연히 들어간 교회 부흥회에서 한 맺힌 절규를 쏟아내고, 이를 계기로 신을 받아들인다. 삶의 자그마한 희망을 붙잡기 위해 절망적으로 신에 의지하는 그녀. "나는 신을 통해 구원 받았으며, 너무나 마음이 평온하다"고 스스로를 속이며, 급기야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신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아들을 죽인 유괴범을 용서하기 위해 교도소로 떠난다. 하지만 '용서'를 다짐하고 찾은 교도소에선 또 다른 절망이 기다리고 있다. 자신의 아이를 죽인 죄책감에 고통 받고 있을 것이라 믿었던 유괴범이 '하나님을 통해 나 역시 이미 구원을 받았다'며 너무나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 자신을 이토록 고통 받는데 왜 천벌을 받아 마땅한 이 사람을 신은 자신보다 먼저 용서할 수 있는 것인가. 이제 더 이상 그녀는 신을 믿을 수 없다. 신에게 배신감을 느낀 그녀. 더 처절히 절망하고 신에 저항하기 위해 스스로를 망가트리기 시작한다. 전작 '박하사탕'의 영호가 그랬던 것처럼, '초록 물고기'의 막둥이가 그랬던 것처럼 '밀양'의 주인공 신애의 삶 역시 절망의 연속이다. 희망을 갖고 뭔가 잘해보겠다고 나서도 운명은 늘 그의 발목은 잡는다. 그렇게 감독은 주인공을 처절한 삶의 끄트머리로 내몬다. 그런 삶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감독은 영화 엔딩의 마지막 단 한 장면으로 모든 것을 설명한다. 마당 앉아 스스로 머리를 자르는 신애의 어깨 너머로 비치는 한줄기 햇빛. 영화가 전하는 희망과 구원의 메시지는 이 단 한 장면만으로 완벽하게 완성된다. 때문에 영화 공개 이후 제기되는 '기독교 희화화' 논란은 차라리 기우(杞憂)에 가깝다. 순수한 고통과 구원의 메시지를 담은 이 영화의 주제의식은 한편의 기독교 영화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성경의 내용과 닿아있다. 다만 이 영화는 우리나라 기독교의 다양한 모습을 리얼리즘적으로 화면에 구현했을 뿐이다. 전도연의 연기는 그야말로 '눈이 부시다'는 표현이 아깝지 않다. 혼자 힘으로 2시간 22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을 너끈히 끌어가며 관객들을 울리고 안타깝게 한다. 원래 연기 잘하는 배우지만, 영화의 질과 감독의 연기지도력이 맞물려 한층 원숙한 연기가 나온 듯하다. 영화 홍보와는 다르게 송강호는 이 영화의 주역이 아닌데, 송강호는 이 사실을 잘 인지하고 훌륭한 조역의 역할을 해냈다. 그의 과장되지 않고 자연스러운 코믹 연기 덕분에 관객들은 절망투성이인 이 영화를 그나마 숨막히지 않고 볼 수 있다. 이밖에도 영화에는 유난히 눈에 익지 않은 많은 무명 배우들이 출연하는 데, 이들의 현실감 넘치는 연기도 영화에 맛을 더한다.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