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니스의 실내' (앙리 마티스, 19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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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스의 실내' (앙리 마티스, 19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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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스의 실내' (앙리 마티스, 19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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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마티스와 불멸의 색채화가들' 展- 가수·화가 조영남
당신이 만일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질펀하게 전시되고 있는 마티스를 기점으로 하는 소위 야수파의 그림들을 둘러 봤다면 당신은 음악에서 베토벤, 모차르트, 슈베르트 3인 중 한 사람이 쓴 어떤 교향곡을 대편성의 오케스트라 연주로 직접 감상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마티스는 현대 미술에서 대체로 세잔느, 피카소 등과 함께 3인의 대표 역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만일 운 좋게도 이들 3인의 그림을 한꺼번에 몽땅 감상했다면 그건 마치 패티킴ㆍ이미자ㆍ조영남의 소위 ‘빅3’ 콘서트를 감상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내 얘기를 듣고 서울경제 독자들 중엔 아니 세상에 자타가 공인하는 현대미술사의 거성 마티스를 어찌 조영남 따위의 한물간 가수와 같은 선상에서 비교할 수 있냐고 펄쩍 뛸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내 방식의 비교를 추호도 취소할 생각이 없을 뿐 아니라 서울대조사위원회가 검증을 나온다 해도 나는 겁 먹거나 주장을 굽힐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예술, 특히 미술에는 생각나는 대로 말 할 수 있는 무한의 자유가 태생적으로 보장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현대 미술의 줄기세포는 마티스와 야수파로부터 배양된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니고 반면 엄밀하게 마르셀 뒤샹(1900년 초 수세식 변기통을 자기 작품이라고 미술 전시회에 출품한 사건을 현대 미술의 원천으로 믿는 경향이 있다)으로부터 배양된다고 해도 역시 틀린 말이 아니다.
그토록 현대 미술은 주장하기 나름이고 누가 목소리를 크게 내느냐가 관건이다. 그래서 특히 미술 평론은 항용 쓴 사람 자신도 무슨 소린지 모를 만큼 장황해지기 마련이다.
마티스나 세잔느로 시작되는 소위 ‘모던 페인팅’(Modern Painting)은 바로 마티스, 세잔느, 피카소를 겁도 없이 한국가수 ‘빅 3’에 비유하는 식의 막가파 정신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네들은 램브란트의 그윽한 그림, 밀레의 ‘만종’이나 ‘이삭줍기’ 같은 보기 좋은 그림에만 안주할 수 없었다. 심지어는 르느아르나 고흐 그림까지도 심심하게만 보였다.
그래서 그네들은 자기네 그림을 감상자들이 그냥 건성으로 지나치게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척 보고 ‘흠 괜찮군, 구성이 그럴 듯 한데’ 하며 그림 앞에 멈춰 서서 두뇌를 써가며 작가가 뭘 그리려 했고 무슨 생각을 전달하려 했는지 감상자 스스로가 알아 내도록 유도하고 싶었다. 보는 그림에서 보고 생각하게 하는 그림으로 미술 영역을 확장하고 싶었던 거다.
시대를 풍미하는 소위 추상 미술의 줄기 세포는 이런 식으로 배양됐다. 다시 말하지만 그림을 보기 좋게 잘 그리면 잘 그릴수록 감상자가 할 일이 없다. ‘흠 아주 잘 됐군’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구성, 원근법, 조형, 색감 등을 무시하고 막가파, 야수(野獸)파적으로 그릴수록 감상자들은 ‘오잉, 뭘 그린거지? 왜 사과를 저렇게 그렸지? 저렇게 괴상히 그렸을 때는 뭔 심오한 뜻이 있겠지’하며 그림 앞으로 달려 든다는 걸 간파한 것이다.
탁 터놓고 얘기하자. 지금 시립 미술관에 가면 거기 야수파 그림이 우아하게 걸려 있다. 글쎄 그렇게 걸려 있다 뿐이지 마티스의 정물화 한 점을 꼼꼼히 들여 다 보면 거기에 ‘헨리 마티스’라는 보일락말락한 사인만 없다면 누가 그 그림을 떼어서 공짜로 나한테 덥석 안겨 준다 해도 별로 고마울 리 없을 만큼 그림의 내용은 형편 없다 못해 너절하기까지 하다.
초등학생도 그런 식의 정물화를 그리지 않을 것 같다. 인물화도 마찬가지다. 그네들은 마치 누가 그림을 흉측하게 그릴 수 있나 시합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 이인성의 그림처럼 멋져 보이는 그림이 단 한 점도 없는 셈이다. 생각 없이 보면 그렇게 보일 수 밖에 없다는 얘기다.
바로 이 지점에서 현대 미술이 요구하는 개념의 줄기세포가 배양돼 나간다. 그리하여 현대 미술은 더도 말고 감상자가 뭔가를 알고 있는 만큼, 감상자가 문화 전반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는 만큼만 감상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알아야 면장을 한다’는 답이 나오게 되는 거다. 음악에서도 베토벤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음악의 야수학파 격인 쇼스타코비치나 윤이상 등의 교향곡을 이해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 오르고’나 ‘물좀 주소’를 쓰고 부른 이 나라 야수파 대중 가수의 선봉 김민기나 한대수의 음악은 웬만한 시(詩)적 소양 없이는 이해가 버거운 것과 유사한 얘기다. 윤이상 등이 한국 현대 음악 각 계파의 줄기세포를 배양해낸 인물이듯이 추상 미술 직전에 야수파라는 완충지대를 단단히 다져놓은 마티스는 야수파를 이끌며 아주 자연스럽게 세계 현대 미술의 원천 자리를 떠 맡게 된 것이다.
그럼 왜 우리네 미술계에는 뚜렷한 학파, 가령 마티스, 블라맹크, 루오와 같은 야수파가 없으며 피카소, 브라크, 후안 그리스 같은 입체파가 없는가. 왜 파(派)가 없는가 말이다. 우리에겐 서로가 서로의 영혼을 나누고 교감하는 일에 애당초 서툰 게 원인인 듯하다.
운동(movement)이나 학파(school) 없이 세계 현대 미술의 흐름을 주도하는 큰 예술가를 기대한다는 건 애당초 무리다. 칸막이를 치고 미술을 한다는 건 스스로 한계를 자초했음을 의미한다.
어찌 미술계만 그러하랴. 지금 전시중인 야수파 그림들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시급한 교훈이 바로 그것이다. 가벼운 교훈도 있다. 아무라도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들 중 누구라도 정물화를 마티스보다 더 잘 그릴 수도 있다. 우리에게 용기를 북돋아주는 마티스는 얼마나 쿨(cool)한가. 모호히 들리겠지만 쿨한 마음이 곧 예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