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칼럼] 우리는 알프스 몽블랑을 넘는다

산악인 허영호(52) 씨가 뱃속 아들에게 한약속을 20년 만에 지켜 가슴 뭉클하게 한 적이 있었다. 2003년 7월, 허씨는 스무 살 난 재석 군과 함께 알프스 산맥의 최고봉 몽블랑에올랐다. 흰 눈 덮인 정상에 서는 순간 허씨는 아들을 부둥켜 안고 펑펑 눈물을 쏟았다. 아들도 살을 에는 칼바람을 잊은 듯 아버지의 사랑에 푹 안겨 울음을 터뜨렸다. 두 부자의 20년 전 약속은 각별했다. 산 사나이로 명성을 날리던 허씨는 아내뱃속에 있는 아이에게 "네가 이 세상에 나와 스무 살이 되는 해에 꼭 몽블랑에 데려가마"하고 굳게 약속했다. 그의 알프스 사랑은 그만큼 깊었다. 당시 알프스는 한국 산악인들에게 꿈의 산이었다. 에베레스트로 눈을 돌린 게한참 뒤로, 그때는 알프스를 올라야 산 사나이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동경의 대상인 몽블랑 등 알프스 주봉을 차례로 등정하면서 그는 자식에게 가슴 벅찬 희열을 안겨주고 싶었다. 그리고 20년 뒤 그는 아들과 함께 스위스로 날아가 깎아지른 빙벽을 타기 시작했다. 아들은 학교마저 쉬며 아버지를 따라 나섰다. 7월 1일부터 13일까지 이어진등정 일정은 목숨을 건 사투였으나 이들 부자는 끝내 정상 등정에 성공하며 약속을현실로 일구어냈다. 그로부터 3년이 흐른 지금, 한국 월드컵팀은 유럽축구의 거봉인 스위스팀을 딛고 16강 고지에 오르겠다며 국민에게 약속하고 있다. 오는 24일, 그 꿈이 실현될지국민적 기대와 여망은 자못 크다. 축구사를 돌아보면, 한국은 스위스에 아픈 기억을 갖고 있다. 오르고 올라도 오를 수 없는 알프스의 수직 빙벽처럼 험준하게 앞을 가로막았던 땅이 바로 스위스였다. 쓰라린 기억은 195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6월 스위스에서 열린 제5회월드컵대회에서 한국은 최초로 월드컵대회에 진출했다가 참담한 치욕을 당해야 했다. 헝가리를 만나 무려 0대9로 참패한 것이다. 이는 월드컵 사상 최다 골차 경기였다. 관중은 "코리아 코리아!"를 외치며 약자 한국팀을 응원했지만 골문은 뻥 뚫린채 오는 공을 속절없이 받아들이기만 했다. 선수 중 4명이나 경기 중에 쥐가 나 쓰러지는 바람에 막판에는 7명만 뛰는 기상천외한 상황이 연출됐다. 1948년 런던올림픽 때 스웨덴에 0대12로 대패한 이후 다시 맞은 한국축구의 '국치일'이었다. 이런 참패에 대해 한쪽에서는 그 정도도 훌륭했다며 애써 위로했다. 파상공세에도 아홉 골밖에 허용하지 않은 것은 기적이었다는 것이었다. 연속골을 내준 골키퍼홍덕영이 영웅 대접을 받았다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한국선수들이 너무 불쌍했던지 장내 아나운서는 "전쟁을 치른 한국팀에 성원을보내자"며 선물을 보내달라고 관중에 호소했고, 다음날부터 선수단이 묵고 있던 호텔에 선물꾸러미가 쌓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흘 뒤인 20일에 열린 터키전에서 0대7로 또다시 대패했다. 이를 본 국제축구연맹(FIFA)은 아시아지역 축구가 수준 이하라며 이 지역 출전국의 수를 1개국으로 제한하기에 이르렀다. 이번 월드컵은 어두운 기억을 털어낼 절호의 기회다. 오늘의 한국은 어제의 한국이 아니다. 그 사이에 많이 컸다는 얘기다. 알프스로만 향하던 산악인들의 발길이이제는 에베레스트, 매킨리 등 세계로 넓어지고 있는 것과 같다. 두 나라가 월드컵에서 맞붙은 적은 아직 없다. 이번 스위스전에서 한국은 알프스 축구의 고개가 아무리 높고 험해도 넘어야 한다. 철각(鐵脚)을 자랑하는 우리 산악인들이 최근에 줄줄이 알프스 연봉을 오르고있듯이 말이다. 허씨는 요새는 대학생과 일반인들도 오르내릴 만큼 알프스의 높이가낮아졌다고 말한다. 이제 우리 태극전사들의 준족(駿足)이 자신감을 갖고 알프스 축구를 뛰어 넘을 차례다. 그렇다고 스위스 축구를 가볍게 봐서는 안된다. 그들은 엄연히 유럽 최강의 실력을 자랑한다. 알프스 3대 북벽인 아이거, 그랑 조라스, 마테호른처럼 스위스 축구는 여전히 방심을 허용치 않는 난코스이다. 그래서 오히려 탐낼 만하지 않은가.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듯이 최선을 다하는 곳에 길이 트이기 때문이다. 한국축구의 운명이 그들의 발끝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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