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변혁의 국제 금융시장] 6. 회계제도 투명성 시급
'유리알 회계'가 기업발전 앞당긴다
선교사와 공인회계사. 양자 사이에는 시간을 뛰어 넘는 공통점이 있다.
자본주의 진출의 첨병이라는 사실이다. 선교사가 들어온 후 값 싸고 질 좋은 서양물건과 상인을 거쳐 종국에는 총과 칼과 대포가 들어와 식민지를 만들었던 제국주의 시절과 달리 요즘에는 회계사와 변호사가 먼저 진출한 후 금융자본이 들어온다. 회계시스템에서 뒤지면 경쟁에서 낙오될 수 밖에 없다는 얘기가 된다.
관련기사
지난해 말 실시된 한 설문조사에서 외국인들은 한국증시의 회생을 막는 장애물 중 두번째로 회계의 불투명성을 꼽았다.
증시 뿐 아니다. 140조원의 혈세가 투입돼 진행중인 기업과 금융구조조정도 회계 투명성이 확보되지 않으면 사상 누각처럼 한 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
잘못된 재무제표를 토대로 부실기업에 대한 투자가 이뤄지고 자금이 조달돼 경제가 운영된다면 모두가 한꺼번에 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회계가 투명했다면 재벌들이 무분별하게 확장에 나설 수도 없었고 IMF도 피할 수 있었다.
뉴욕의 월가가 세계 금융의 심장부로 자리잡을 수 있게 한 경쟁력의 근원도 회계의 투명성 이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현실은 아직도 아득하다. 기업들은 여전히 준조세를 내기 위해서라도 비자금을 조성해야 하고 따라서 분식회계가 불가피하며 회계사들은 일거리를 따내기 위해서는 감사 대상 기업의 요구에 자유스럽지 못한 상황이다.
부정이 발생했어도 징벌을 위해 거쳐야 하는 수차례의 절차 때문에 로비에 밀리고 결국 유야무야되는 일이 부지기수다.
IMF이후 회계제도를 고치는 작업이 시작됐지만 제도만 고친다고 뒤엉켜 있는 악순환의 고리가 쉽게 끊어질 것으로 보이지는 않고 있다.
회계 제도 개선을 추진하고 있는 한 전문가가 "언제쯤 제대로 될 것 같으냐"는 질문에 대해 "아무리 개혁을 추진한다 해도 10년 안에 큰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답변했을 정도다. 한국회계의 문제점을 짚어보고 대안을 모색해본다.
◇유명무실한 견제 장치=국내에서는 견제 시스템이 한국공인회계사와 증권선물위원회, 재경부 등 3곳으로 나눠져 있어 부정을 적발했을 때 징계를 내리기 까지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 과정에서 학연, 지연 등이 개입하고 기업과 회계법인의 로비가 횡행해 용두사미로 끝나는 일이 흔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갖고 있다.
소송제도도 손해배상액보다 소송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경우가 많아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고 관계자들은 전하고 있다.
어떤 한 주주가 손해배상 소송에서 승소했을 경우 다른 주주들에게도 똑같은 배상을 하도록 하는 집단소송제도도 업계의 로비와 법조계의 반대로 실제로 시행될 지 여부가 불투명한 상황이다.
미국에서는 회계의 투명성을 떠받히는 두 가지 큰 축은 부정이 적발되면 강한 징벌을 내릴 수 있는 소송제도와 회계사협회 윤리규정이다.
그중에서도 부정을 막는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은 소송제도. 미국에는 공동책임제도와 죄질이 나쁠 때는 손해배상액을 벌과금조로 높게 물리게 할 수 있도록 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공동책임제도는 회계법인과 기업이 공동으로 책임이 있기 때문에 잘못된 재무제표에 따라 투자를 해 손해를 입은 투자자는 그 중 어디든지 한 곳에 손해배상액 전액을 청구할 수 있는 제도.
예를들어 잘못된 회계로 손해가 발생했을 경우 기업이 50%, 회계법인이 30%, 투자자가 20%의 책임을 져야 할 경우 투자자는 80%에 해당하는 금액을 회계법인 한 곳에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그럴 경우 회계법인은 해당하는 손해배상액을 지불하고 다시 50%에 해당하는 금액은 기업에 청구할 수 있도록 한 제도다.
대체로 잘못된 회계로 피해가 생길 때는 기업이 부도가 난 상황이어서 사실상 회계법인이 뒤집어 쓰도록 한 것이다. 일부 주에서는 이 제도가 너무 가혹하다고 해서 폐지한 곳도 있다.
또 하나는 가해자의 죄질이 매우 나쁠 경우 벌과금조로 피해액의 10배 내지 100배까지 배상액을 높게 지급토록 할 수 있는 제도다.
사실상 이 제도 때문에 소송이 많이 생기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소송비용을 감안하면 안 한 것만 못하기 때문에 포기하는 일이 많지만 미국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결산기 몰려있어 부실 감사성행= 거래소 상장회사 중에 12월말 결산법인이 전체 703개업체중 81.5%인 573개를 차지하고 있다.
코스닥 등록법인은 88.8%에 한다.(2000년8월말기준) 3월말, 6월말, 9월말 결산법인도 있지만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이에 따라 회계사들은 주총을 앞둔 2월에 대량의 감사작업을 벌여야 한다. 2월은 회계사들에게 1년중 쏟아지는 일거리 때문에 무척 바쁜 시기가 되고 따라서 부실감사도 대량생산될 수 밖에 없다. A회계법인의 K씨는 "2월에는 일거리가 한꺼번에 몰려들기 때문에 별도의 부채가 있는지, 재고물량을 제대로 기재했는지 조사할 시간이 없다"고 말했다.
이같이 결산기가 몰린 것은 1~12월을 주기로 예산을 짜는 정부에서 비롯됐으며 여러 기업들에 묻혀서 함께 결산을 해야 감시의 눈길도 피할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회계감사에 대한 사회적인 비용지불 늘려야= 감사를 받아야 할 회사 경영자가 감사인을 선택하고 감사보수를 결정할 수밖에 없는 감사인 제도 때문에 회계 감사가 헐값으로 수행되고 있다.
감사인의 감사 의견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지 바꿀 수 있는 현행 감사계약 제도 아래서는 그나마 감지덕지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현재의 비용수준으로는 인력과 시간을 충분히 투입할 수 없기 때문에 부실감사가 생길 수 밖에 없고 질 높은 감사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윤승준 한국회계연구원 조사연구팀장은 "우리나라의 감사 수임료가 미국의 10분의1 수준"이라며 "투명한 회계시스템을 보장 받으려면 결국 사회에서 지불하는 비용이 늘어 나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외국계 잠식 진행중= 외환위기 이후 기업 구조조정과 경영혁신 바람을 타고 들어온 외국계 대형 회계법인들이 컨설팅에서 회계감사로 눈길을 돌리고 있다.
주택은행이 지난 99년 미국의 대형 회계법인인 PWC에 감사를 의뢰한데 이어 하나은행 등 다른 기업들로 확산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국내 회계법인들에 대한 신뢰가 형성되지 않을 경우 결국 감사시장도 외국의 대형법인들에게 내줄 수 밖에 없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영국계 미국계 등 외국의 대형 회계법인들이 국제 로펌과 더불어 중국을 중심으로 아시아 등으로 몰려오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 유명회계법인의 대표를 지냈던 K씨는 "공인회계사 시험에 합격하고 외국 유학을 다녔왔을 때 까지 스스로 '세계 최고의 회계경쟁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가장 낙후됐음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최우수 인력들이 몰려 있다는 회계시장의 경쟁력은 한국의 국가경쟁력을 상징한다"고 덧붙였다.
오현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