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닉스반도체의 이천공장 증설 문제가 1년이 넘도록 표류하고 있다. 정부의 불허 방침에다 수도권 규제까지 맞물리면서 하이닉스 문제는 이제 지역감정을 등에 업은 정치싸움으로 번지고 있다.
하지만 하이닉스를 둘러싼 논란이 커질수록 풀리지 않는 의문이 생긴다. 정작 하이닉스의 지배주주인 채권단의 의견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채권단은 시종일관 ‘나 몰라라’ 하며 그저 팔장만 끼고 있다.
외환위기(IMF) 이후 채권단 관리에 들어간 기업들은 부실채권 회수를 앞세운 채권단의 무리한 경영 간섭에 시달렸다. 갖은 우여곡절 끝에 관리 기업의 몸값이 원금보다 더 불어난 지금도(물론 채권단에서는 투자라고 주장하지만) 채권단의 입장은 바뀐 것이 없다. 달라진 게 있다면 경영에는 간섭하되 결정적인 의사 결정에는 한발 물러나겠다는 것이다. 괜히 문제를 만들어 미움을 사지는 않겠다는 태도다.
하이닉스의 공장 증설에도 채권단의 입장은 명확하다. 아예 방관하는 것이다. 최고경영자(CEO)의 선임과 같은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있는 의사 결정에는 목소리를 높이지만 정부와 부딪힐 수 있는 의사 결정에는 총대를 메지 않겠다는 의도다.
하이닉스가 애초부터 불가능한 지역인 줄 알면서 대규모 투자를 이유로 ‘밀어붙이기’를 했다면 하이닉스의 최종경영자인 채권단도 명확한 의견을 내놓고 사전에 이천 증설이 불가피한 점을 정부와 국민에게 설득하는 데 힘을 실었어야 했다. 더구나 연내 매각을 목표로 삼고 있는 채권단이라면 D램공장 증설이 하이닉스 몸값을 최대한 올리기 위한 방법이라는 것을 모를 리가 없다.
하이닉스 공장 증설은 하이닉스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난해 전체 수출의 11%(374억달러)를 책임지고 있는 한국 반도체산업 전체의 성장전략이다.
경쟁 업체라고 할 수 있는 삼성전자의 고위 경영진마저 최근 “정부가 전자 업계의 사기를 북돋워줘야 한다”며 “(하이닉스가) 정부와 합의점을 찾아야 한다”고 거들고 나선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부실채권이 투자자산으로 변했다면 하이닉스 채권단도 지금이라도 투자 기업의 경영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게 도리일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