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위기국들의 신용등급이 줄줄이 투기등급으로 떨어지면서 유럽의 자금난이 가중되고 있다. 25일 발행된 이탈리아의 2년만기 국채에는 7.8%를 넘는 사상 최고수준의 금리가 적용됐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도 독일 등 유럽 수뇌부는 해법을 내놓기는커녕 ‘치킨게임’에만 몰두하고 있어 시장에 비관론이 확산되고 있다.
국제 신용평가기관인 무디스는 24일 헝가리의 국가 신용등급을 기존 Baa3에서 정크(투자부적격) 등급인 Ba1으로 강등한다고 발표했다. 무디스는 성명에서 “헝가리가 이미 국제통화기금(IMF)과 유럽연합(EU)에 구제금융을 요청했다”며 “유럽 신용경색으로 자금시장이 얼어붙었고 경제성장 전망도 어둡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이에 앞서 피치도 포르투갈의 신용등급을 BBB-에서 BB+로 하향 조정한다고 발표해 시장에 충격을 안겨주었다.
전문가들은 유럽 각국의 국채가 대량 매도공세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이처럼 등급 강등 도미노 현상까지 가세하면서 유럽의 자금경색이 더욱 심화되는 악순환을 낳을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이탈리아는 25일 사상 최고금리로 100억유로 규모의 국채를 발행했다. 이날 발행된 80억유로 규모의 6개월 만기 국채에 적용된 금리는 6.504%로 지난 10월26일의 발행금리 3.535%에 비해 3%포인트 가까이 올랐다. 2년만기 국채 금리도 7.814%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유로존에서 가장 견실한 독일마저 흔들리면서 24일 독일의 10년물 국채금리는 2009년 3월 이후 처음으로 영국 국채 금리를 웃돌았다. 시장이 독일보다 영국 국채를 더 안전하게 본다는 얘기다.
이날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 마리온 몬티 이탈리아 총재 등 3개국 정상이 위기극복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모였지만, 이들의 긴급 회동은 시장에 실망감만 안겨준 것으로 평가된다.
정상들은 마지막 구원투수로 여겨졌던 유럽중앙은행(ECB)에 “어떠한 요구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혀 국채 매입 확대를 요구해온 시장의 기대를 무산시켰다. 메르켈 총리 역시 논란이 돼온 유로본드(유로존 공동발행 채권) 도입에 대해 "필요하지도 않을 뿐더러 매우 부적절한 위기 대책"이라고 못박았다.
이들 3국 정상은 유로존 국가들의 재무 상황을 감시할 수 있는 통합기구를 창설하고 정치적 통합을 위해 EU 조약을 개정하겠다고 밝혔지만, 시장에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에서 큰 그림만 그리고 있다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재정 위기국의 국채 금리가 너무 많이 뛰어올라 1조유로 규모로 확충하기로 한 유럽재정안정화기금(EFSF)이 힘을 쓰지 못할 것이라는 비관론도 나오고 있다. EFSF를 활용해 위기국이 발행하는 채권의 손실액을 일정 부분 보증해주겠다는 게 유럽 위기 극복의 골자이지만 각국의 자금조달 비용이 지나치게 높아져서 국채 시장을 커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편 월스트리트저널은 ECB가 국채 매입 확대 대신 은행에 대한 장기 대출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고 익명의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이날 전했다. 현재 최장 13개월 만기인 대출 기간을 2~3년으로 늘려 자금조달에 숨통을 틔워주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ECB에 손을 벌리는 은행이 워낙 많고 대출 여력은 제한돼 있어 이 역시 근본 대책이 될 수는 없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