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기업 업종에 진출한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직원을 바지사장으로 내세우는 등의 꼼수를 부린 대기업의 행태가 재판 과정에서 드러났다.
14일 서울고법에 따르면 유통 대기업인 A사는 낮은 가격에 청과를 구입하기 위해 지난 2004년 산지 직거래팀 소속인 B(46)씨로 하여금 개인사업자인 것처럼 행동하게 했다. 대기업이 거래상대일 경우 농민들이 청과 대금을 비싸게 요구하며 대기업이 중소기업 업종에 진출한다는 비난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영업해온 A사는 이후 B씨에게 208억원을 지급해 청과 선과장을 설립하도록 했고 B씨는 몇 년간 안동 사과와 제주도 감귤을 회사에 공급했다. B씨가 공급한 청과는 A사 직영의 선과장에서 가공된 뒤 각 매장으로 공급됐다. 5년간 이처럼 영업해온 A사는 2009년 '농어업경영체 육성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이 개정돼 정부의 산지육성자금을 저리로 지원 받는 것이 가능해지자 선과장을 회사 자산으로 편입하기로 결정하고 B씨에게 선과장과 통장 등을 반환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몇 년간 청과 직구매 업무를 수행한 자신의 공로를 제대로 보상받지 못했다고 여겨 불만을 갖고 있던 B씨는 선과장과 통장 반환을 거부했다. 선과장과 통장이 B씨와 B씨의 아내 명의로 돼 있어 돌려받을 수 없게 된 A사는 B씨를 횡령 혐의로 고소했다.
지난해 9월 1심을 담당한 서울남부지법 재판부는 "B씨는 A사의 소유인 선과장을 운영했을 뿐이므로 통장과 선과장은 A사의 재물"이라며 B씨에게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하지만 항소심을 맡은 서울고법 형사5부(김상준 부장판사)는 원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했다. B씨가 A사의 직원이긴 하지만 일반 청과 도매상과 별 차이 없이 독자적인 판단을 기준으로 청과를 사들여 공급한 데다 꾸준한 수익을 내기 위해 선과장을 성실히 관리해온 노력을 인정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재판부는 "B씨는 천재지변이나 예상치 못한 가격 변동 등 어려움 속에서 비용을 절감하고 이익을 취득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며 "자신의 공로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고 이를 주장하기 위한 수단으로 통장잔액 등에 대해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