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시스템 개조하자] 8부. 선진화된 사회체계 구축 <4> 루저에게도 기회를

실패는 혁신의 밑거름… '주홍글씨' 딱지보다 재도전 길 터줘야
젊은층 실패 두려워 창업꺼려 스타 벤처 줄고 CEO 고령화
(주) 대한민국 성장동력 꽁꽁
폐업 위기 처한 기업가 대상 사전신고제 도입·재취업 등 재기 위한 출구 정책 마련을


6월 초 충북 청원에 위치한 공군사관학교. 최치훈 삼성카드 사장이 사관생도 500명 앞에서 한창 강연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공군장교 출신인 최 사장이 후배들에게 그의 성공스토리를 들려주는 자리였다. 한국인 최초 제너럴일렉트릭(GE) 최고경영진, 삼성전자·삼성SDI·삼성카드 사장 등 화려한 이력을 자랑하는 최 사장. 사관생도들이 선망과 동경이 가득한 표정으로 그의 강연에 귀를 기울였다. 그중 한 사관생도가 최 사장에게 "살면서 실패한 경험이 있느냐"고 불쑥 질문을 던졌다. 이에 최 사장은 "단 한번이라도 실패했다면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순간 사관생도들의 표정에는 묘한 긴장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선진국에 비해 압축적인 산업화와 경제성장을 일궈낸 한국. 전세계는 이를 '한강의 기적'이라고 칭송한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산업현장을 뛰어다니며 '빨리빨리'를 주문처럼 외치던 ㈜대한민국은 성공을 향한 무한경쟁을 동력 삼아 한발한발 전진해나갔다. 피 말리는 경쟁에서 '실패'는 곧 영원한 낙오를 의미했다. 그런데 최근 실패에 대해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실패를 두려워하는 한국 사회의 경직된 분위기가 경제 및 사회발전의 활력을 저해한다는 인식이 퍼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최근 페이스북 창업자인 마크 저커버그를 만난 자리에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벤처생태계를 만들겠다"고 공언하기도 했다. 한발 더 나아가 실패를 혁신과 발전의 밑거름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에도 힘이 실리고 있다. 2000년대 초반 벤처1세대의 대표주자로 꼽히는 이민화 KAIST 교수는 "실패를 용인하는 문화가 없으면 혁신과 창조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실패의 가치'에 대한 우리 사회의 담론이 수면 위로 떠오른 셈이다.

◇실패를 두려워하는 사회…움츠린 기업가정신=2000년대 초반 강남 테헤란로를 중심으로 불었던 벤처붐은 IMF 외환위기 사태에 시름하던 한국 경제에 활력을 가져다줬다. 당시 벤처창업 최고경영자(CEO) 중 절반 이상이 20ㆍ30대였을 만큼 벤처 붐의 중심에 청년창업가들이 있었다.

하지만 최근 10년 사이 국내 벤처업계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청년창업의 열기가 급격하게 사그라지면서 벤처 CEO의 고령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중소기업청이 발표한 '2012년 벤처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2011년 말 기준 전체 벤처CEO 가운데 20ㆍ30대의 비중은 19.5%에 불과했다. 2000년 54.5%에 달했던 것과 비교하면 10여년 만에 청년창업가 숫자가 3분의1 수준으로 오그라들었다. 반면 50ㆍ60대 CEO 비중은 33%로 2000년(10%) 대비 세 배 이상 증가했다. 벤처 CEO 5명 가운데 4명은 40대 이상의 중장년층인 셈이다.

전문가들은 국내 벤처기업 CEO 고령화의 원인으로 기업가정신 실종을 지목하고 있다. 배종태 KAIST 테크노경영대학원 교수는 "2000년 이후 스타 벤처기업은 늘지 않고 우수한 인력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에 창업을 꺼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 대학생들은 창업대열에 뛰어들기보다는 정년이 보장되는 안정된 직장을 찾아 도서관에서 취업준비에 매진하고 있다. 취업 포털인 잡코리아의 최근 설문조사 결과 대학생의 60%가량은 공무원 시험을 준비(27.9%)하고 있거나 한때 준비한 적이 있는(32.5%) 것으로 나타났다.

◇한번 실패하면 '주홍글씨' 새기는 대한민국=2030세대의 창업의욕이 꺾이면서 ㈜대한민국의 성장동력은 고갈돼가고 있다. 노령사회, 양극화로 인한 사회갈등, 복지와 사회안전망 투자비용 등 경제적 부담을 감당할 여력이 없다. 그렇다고 '도전' 대신 '안정'만을 추구하는 2030세대를 지탄할 수만은 없다. 기업가정신이 싹을 틔우기에는 한국 사회의 토양이 너무 척박하기 때문이다.

현대경제연구원의 조사 결과 창업기업의 60% 가까이는 설립 3년이 채 안 돼 문을 닫는 것으로 집계됐다. 그나마도 전기ㆍ전자, 화학 등 제조업의 창업 비중은 5.9%에 불과했고 서비스업이 87.7%를 차지했다. 조호정 현대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은 "패자부활전을 허용하지 않는 문화가 혁신적 창업가들의 등장에 장애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며 "위험은 많지만 경제에 파급효과가 큰 기술혁신형 창업은 줄어들고 음식점 프랜차이즈 등 상대적으로 위험이 낮은 생계형 창업만 늘어나고 있다"고 분석했다. 한번 실패한 기업가들에게 재기의 기회를 주지 않는 사회 분위기가 기업가정신의 후퇴를 초래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실패한 기업가들은 연대보증 등으로 '채무불이행자'로 전락한다. 개발자는 톡톡 튀는 아이디어를 지니고 있어도 연구개발(R&D)에 일단 실패하면 연구비를 반납하고 연구참여에 제한을 받는다. '사업 한번 하면 집안을 말아먹는다'는 속설이 사회 구성원에게 큰 설득력을 지니고 있을 만큼 기업가는 단 한번의 실패에도 낙오자라는 '주홍글씨'가 평생 따라붙는다.

◇실패에 관대한 문화 자리잡아야=개인 재산만 230억달러가 넘는 구글의 창업자 래리 페이지는 전세계 벤처 신화의 아이콘이다. 그런 그가 올해 4월 한국을 방문해 실패를 용인하는 학교와 사회 분위기를 강조했다. 페이지는 "구글을 시작하면서 공동창업자와 함께 박사과정에 있었다"면서 "학교에서 사업에 실패해도 다시 받아주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창업에 나설 수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전문가들은 한국 사회의 성장정체에 대한 고민과 해답을 '실패'에서 찾으라고 지적한다. 우수 인력을 양성하고 창의적인 기술을 개발하는 것만큼이나 '정직한 실패'에는 재기의 기회를 주는 사회적인 관용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창조경제'를 강조하는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실패한 벤처1세대 기업가의 재기를 지원하고 나서는 등 변화의 움직임이 이미 감지되고 있다. 실패 기업가들에게 족쇄를 채우던 연대보증제도도 제도권 금융기관에서는 사실상 퇴출됐다. 하지만 정부와 우리 사회가 조금 더 적극적으로 실패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지적도 많다. 조 선임연구원은 "경영난으로 폐업 위기에 처한 기업가를 위해 사전신고제를 도입, 폐업자를 대상으로 재취업이나 재창업을 지원해줘야 한다"고 제안했다. 사업재기를 위한 출구정책과 사업전환을 지원해줘야 한다는 의미다.

이와 함께 입시 위주의 교과과정과 성적대로 줄을 세우는 초중고교에서도 기업가정신 및 실패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심어줘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된다. 김익성 중소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학생들이 아주 작은 것부터 먼저 생각할 수 있도록(Think small first) 기업가정신에 대한 가치관과 성공모델을 정립시켜줘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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