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2014]개막전이 숨긴 아마존 원주민의 비극

구아라니족 소년 오프닝 행사 후
'자치권 박탈' 헌법개정안 반대 배너
카메라 외면... TV엔 방영 안돼

한 브라질 원주민 소년이 13일 열린 2014 브라질 월드컵 개막전 기념행사 후 그라운드를 떠나면서 자치권 박탈을 담은 헌법 개정안에 항의하는 내용을 담은 붉은 천을 펼쳐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 장면은 어떤 TV에서도 중계되지 않았다. /사진=브라질 구아라니 페이스북

13일 브라질과 전세계에 생방송으로 이뤄진 브라질과 크로아티아간 개막전 기념행사. 여기서는 소년들이 비둘기만 날리고 영상에서 사라졌다. /사진=KBS영상캡처

지난 13일(한국시간) 2014 브라질 월드컵 개막전이 열렸던 상파울로 코린치앙스 경기장. 브라질과 크로아티아 축구 대표팀 선수들과 심판이 빙 둘러싸고 있는 센터서클 안으로 3명의 소년이 걸어왔고 곧 이어 개막을 축하하는 비둘기를 날렸다. 여기까지는 아무 일도 없었다.

하지만 행사를 마치고 퇴장하는 순간 한 소년이 갑자기 호주머니에서 붉은 천을 꺼내 머리 위로 쳐들었다. ‘DEMARCACAO JA!(지금 구획을!).’

하지만 경기장에 있던 이들을 제외하고 이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신 모든 카메라는 비둘기와 양팀 선수만을 비추고 있었다.

17일 브라질 뉴스사이트인 G1에 따르면 2014 월드컵 개막전 세레머니 직후 브라질 남부 구아라니족 출신의 13세 소년이 그라운드 안에서 헌법 개정에 항의하는 1인 시위를 벌였다. 유니폼 주머니에 시위 내용을 담은 붉은 천을 숨겼다가 퇴장하면서 관중석을 향해 펼쳤던 것. 양 팀 선수들과 심판은 이 소년의 모습에 일순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화면에는 나타나지 않았기에 아무 일 이 넘어가는 듯 했다.

방송사의 외면으로 묻힐 뻔했던 이 모습을 브라질 전역에 알린 것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망(SNS). 구아라니족은 이 소년의 시위 모습이 담긴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렸고 금새 상파울로 등 전국으로 퍼졌다.

불과 13살에 불과한 소년이 월드컵 개막전에서 시위를 하게 된 것은 아마존 원주민의 생존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소년이 속한 구아라니족은 거장 엔니오 모리코네의 아름다운 오보에 선율이 가슴을 울렸던 롤랑 조페 감독의 영화 ‘미션(Mission)’에 나왔던 부족들. 남미의 대표적인 토착부족 중 하나지만 최근 제지, 담배회사들의 플랜테이션 농업으로 생활터전은 급속히 줄어들고 있다.

게다가 최근 브라질 의회가 헌법 개정을 통해 기존에 원주민에 부여했던 토지 구획권한을 의회로 넘기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구아라니족의 위기감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개정안이 통과될 경우 난개발이 더욱 심화돼 생활터전을 완전히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활과 화살로 상파울로 도로를 지나가던 자동차를 세우고 개정안을 추진하는 의원의 사진을 태우는 등 집단행동에 나서기도 했다.

개막전 1인 시위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된 구아라니족은 페이스북을 통해 “방송 카메라가 이번 세레머니 중 유일하게 진실한 메시지를 담은 모습을 방송하지 않은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강하게 비난했다.

소년의 아버지도 페이스북을 통해 “기념행사에 참석한 아들을 발견하고 일부 사람들이 비판도 했지만 지금은 수 십 명으로부터 친구를 하자는 요청을 받고 있다”며 “우리는 월드컵에 반대하는 게 아니라 부정의에 항의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디지털미디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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