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Story] 승효상 종합건축사사무소 이로재 대표

난 실수투성이… 결과물 보면 처참할 때 많아
실수 없이 완벽한건축 나오면그때 손떼야죠
건축은 '터무니' 가장 중요… 무작정 산 깎고 메워선 안돼
아파트엔 공동체 삶 담아야
용산공원 '재생' 테마로 서울 정체성 살려낼 것



"우리의 주택이 고층화되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공동주택,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아파트는 고층화만 이뤘지 공동적 삶은 찾을 수 없는 집합주택일 뿐입니다. 2017년 중계동 백사마을에 제가 설계하는 임대 아파트가 들어섭니다. 바로 옆에 기존 형태의 아파트도 분양됩니다. 두 마을의 차이가 확연할 겁니다. 두고 보세요."

건축계의 거장 승효상 종합건축사사무소 이로재 대표. 그는 터의 무늬를 없애는, 즉 이 땅을 훼손해 백지처럼 만든 후 올려지는 건축과 건축 행태에 대해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승 대표는 "주택이 고층화되더라도 그곳에 공동적 삶을 집어넣으면 된다"며 "설계에 문제가 있는 것이지 아파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15년간 김수근 선생 문하를 거쳐 1989년 독립한 후 1992년 선언한 '빈자(貧者)의 미학'이라는 화두로 자신의 건축 세계를 쌓아온 승효상. 이로재의 서재 겸 작업실에서 그를 만나 치열했던 삶과 그간의 성과, 건축가로서 그가 희망하는 미래 서울의 모습을 들어봤다.

그의 건축 기조인 '빈자의 미학'. 그가 집필했던 수권의 저서와 여러 차례의 인터뷰에서 소개됐지만 건축에 적용되는 개념으로 '가난한 사람의 미학'이라는 말은 쉽게 와 닿지 않았다. 승 대표는 "가난할 줄 아는 사람의 미학"이라고 강조했다. "내가 짓는 집 때문에 옆집 사람이 피해를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건물은 사유재산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돈의 크기로만 집을 짓지 말고 절제하면서 검박하게 주변과 어울리게 짓자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는 "건축가는 건축주에게도 봉사해야 하지만 더 큰 봉사는 사회와 시민에게 해야 한다"며 "두 이해가 부딪힐 때 건축가는 사회와 시민의 편을 들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타협할 수 없는 원칙을 내세운 후 건축의 길을 걸은 지도 20년이 넘었다. 그가 스스로에게 몇 점이나 줄 수 있을지 궁금했다. "글쎄, 한 45점 정도. 그동안 원칙은 반드시 지켜왔지만 내 실력이 모자라 실수투성이였어요. 그래서 소망이 있다면 실수를 하나도 안 하는 건축을 하는 겁니다. 그런 건축이 하나라도 나오면 그때는 건축을 안 해도 되겠지요."

거장이라고 불리는 건축가가 실수투성이라고 스스로를 혹평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건축은 건축주의 부탁을 들어줘야 하고 동료 및 컨설턴트의 의견도 수용해야 하며 또 법규와 시공자를 거쳐야 완성되는 결과물입니다. 따라서 처음의 구상을 일관되게 지킨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고 마지막 결과물을 볼 때면 처참할 때가 많습니다."

그는 '터무니', 즉 터의 무늬를 중요시 하는 건축가다. 모든 터에는 무늬가 있고 옛 사람들은 터에 새겨진 무늬처럼 살았으며 건축도 터의 무늬를 살려서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우리의 건축은 지금까지도 터의 무늬를 없애는 방식이라는 게 그의 불만이다.

"서양의 도시는 평지를 전제로 계획된 것입니다. 그런데 서양의 도시계획도를 산이 많은 우리 땅에 가져다놓으니 산이 있으면 깎고 물이 있으면 메울 수밖에 없죠. 그렇게 터의 무늬를 다 없애고 지은 집이 아파트인 겁니다."

이처럼 '전면 철거 방식의 재개발은 죄악'이라는 승 대표의 반복된 비판을 수용해 서울시가 그에게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인 중계동 백사마을 재개발의 커미셔너를 맡겼다. 그가 직접 아이디어를 낸 백사마을은 서울에서 처음으로 원형을 보존하는 방식으로 재개발이 이뤄진다. "마스터 플랜은 다 짜놓았고 내년부터 건축가 12명이 모여 세부 설계를 시작하는데 아파트도 기존의 것과는 출발부터 다른 아파트가 나올 것"이라고 전하는 그의 목소리에서 새로운 것을 보여주겠다는 의지가 묻어났다.

최근 지어진 건축물 중 가장 터무니없는 것으로 '동대문 디자인 센터'를 꼽은 승 대표. "그 건물이 들어선 땅이 억울하고 지나다니며 그 건물을 봐야 하는 시민들이 억울하다"고 말하는 그는 새로운 서울을 꿈꾸며 크고 작은 일들을 벌이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용산공원 조성 사업. 국제 설계 공모에서 당선돼 네덜란드 조경업체 웨스트8과 같이 작업하고 있다. 2027년이 완공 목표인 용산공원 사업을 그는 '재생'이라는 말로 정리했다. "용산은 서울의 한 복판에 있습니다. 그 중심을 비움의 상태로 만들 수 있어 매우 중요합니다." 그는 이어 "용산은 미국과 중국ㆍ일본이 점령했던 땅이고 또 용산은 백두대간에서 한강까지 연결되는, 대단히 중요한 생태축"이라며 "따라서 용산의 복원은 도시의 재생, 역사의 재생, 환경의 재생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승 대표는 서울의 재생을 위해 용산 복원과 함께 세운상가의 부활을 구상 중이다. 세운상가에 데크를 설치하면 도시를 가로지르는 건축으로 도시를 통합할 수 있다는 것. "세운상가에 데크를 달면 남산에서부터 종묘까지 연결됩니다. 그러면 자연히 종로와 청계천, 을지로 지하공간으로도 연결돼 사람들이 모두 걸어서 다닐 수 있어요. 오래된 철로를 이용해 만든 뉴욕의 하이라인 파크(Highline Park)처럼 큰 인기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승 대표는 올해 초 서울시의 건축정책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불합리한 건축 관련 제도를 뜯어고치는 한편 서울시가 정체성을 되찾는 작업에 기여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후배 건축가들에게 나쁜 제도를 물려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서울시 일을 하면서 턴키(설계ㆍ시공 일괄 발주)를 없앴고 선정 방식도 현상 공모를 통해 뽑도록 했다"며 "구상하는 시스템만 갖춰지면 불이익을 받는 건축가가 없어질 것"이라고 전했다.

그리고 지난 8월 서울시가 발표한 '서울건축선언'은 그가 지향하는 도시 서울의 밑그림이기도 하다. 서울건축선언에는 그동안 개발 논리에 집착해 건축물을 짓던 방식에서 벗어나 시대가 변해도 훼손되지 않을 지속 가능한 건축을 하자는 원칙이 담겨 있다.

서울이 가진 역사, 생태, 민주적 정체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그가 그리는 서울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서울은 600년 역사의 도시인데 올드 시티와 뉴 시티의 구분이 전혀 없어요. 도성 안과 도성 밖을 구분해 도시 계획을 해 도성 내는 비움의 도시로 만들자는 겁니다. 심하게 말하면 도성 안에는 건물도 짓지 말고 자동차 못 들어오게 하고. 서울에는 산이 많아 언제든지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어요. 지금까지의 행위를 반성하고 서울의 정체성을 살려내야 합니다."

승 대표는 건축이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은 물론 이 시대를 이끄는 혁명까지도 일으킬 수 있다고 믿는 건축가다. 그 건축이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끝으로 그에게 건축의 위기에 대해 물었다.

"어쩌면 지금이 한국의 건축계를 위해서는 굉장히 좋은 때일 수도 있습니다. 흥청망청할 때는 건축을 왜 해야 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안 합니다. 요즘처럼 일거리가 없을 때 근본으로 돌아가 성찰을 해야 합니다. 이때를 건강하게 견디고 살아남는 생각이 한국의 건축을 더욱 튼튼하게 만들 겁니다. 한국 건축을 위해 우리가 디디고 있는 이 땅을 다시 바라볼 때가 지금이라고 생각합니다."









승효상 대표는



▲1952년 부산 ▲서울대 건축학과 및 동대학원 ▲1981년 빈 공과대학 건축공학과 수학 ▲1974년 공간연구소 입사 ▲1986년 공간연구소 대표 ▲1989년 이로재 설립ㆍ대표 ▲2002년 미국건축가협회 아너러리펠로십(Honorary Fellowship)ㆍ국립현대미술관 주관 올해의 작가 선정 ▲2005년 베를린 AEDES 갤러리 초청건축전 ▲2008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커미셔너 ▲2011년 광주디자인비엔날레 총감독 ▲2012년 베니스비엔날레 초청작가 ▲2013년 서울시 건축정책위원회 위원장ㆍ한국건축문화대상 심사위원장


■ 주요 작품

▲수졸당 ▲수백당 ▲웰콤시티 ▲퇴촌주택 ▲모헌 ▲대전대 30주년 기념관 ▲파주 교보문고 센터 ▲지산 발트하우스 ▲구덕교회 ▲중국 베이징 장성 클럽하우스 ▲아부다비 문화지구 전시관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복합빌딩 ▲봉하마을 묘역 소석원 ▲중국 하이난시 보아오 주택단지










오스트리아 로스 하우스에 전율… 공간 사옥 공매는 치욕



박태준기자




"공간 사옥이 부동산 매물로 나왔다는 건 정말 치욕스러운 일입니다. 서울시가 문화재청에 등록문화재 신청을 해놓은 상태고 문화계 인사 분들과도 매각을 막기 위한 공동 기자회견을 비롯해 여러 방안을 논의하고 있습니다."

승효상 대표는 인터뷰에 앞서 공매를 앞둔 공간 사옥에 대한 안타까움을 먼저 털어놓았다.

승 대표와 한국 건축계의 거목이라고 불리는 고(故) 김수근, 그리고 공간연구소와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을까. 그는 "건축에 대한 모든 것을 공간에서 김수근 선생에게 새롭게 배웠다"고 말한다.

온 가족이 이북에서 월남한 승 대표는 어린 시절 부산의 한 난민촌에서 성장했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책을 남독(濫讀)하는 습관이 있었던 그는 누님의 권유로 서울대 건축학과에 입학한다. 하지만 학교 수업은 그를 건축으로 이끌지 못했다.

"아무도 건축의 본질에 대해서는 얘기해주지 않는 거에요. 게다가 유신 시절이기도 했고요." 그의 대학시절 별명은 데프. 그는 "학점이 DㆍEㆍF만 있었기 때문에 붙은 별명"이라며 웃었다.

수업에 관심이 없었던 그가 당시 유일하게 따랐던 은사 김희준 교수가 4학년을 마칠 무렵 갑자기 그를 김수근 선생의 문하로 보낸다.

그리고 승효상과 김수근의 사투가 시작된다. "그때는 퇴근이라는 걸 해본 적이 없습니다. 당시 내가 건축을 한다는 건 사회로부터의 도피였으니까. 그냥 김수근이라는 사람이 적이 돼 이 사람을 넘어뜨려보자. 이런 오기가 생겼죠."

김수근에 대한 도전과 패배로 점철돼 본인 스스로도 '치열했다'고 회고하는 당시 그의 삶은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잠시 멈춰 선다. 돌연 오스트리아로 유학길에 올랐기 때문. "이 땅에서는 도저히 살수 없었던 거죠. 마산성당을 설계하면서 가까워진 오스트리아 신부님 도움으로 유학을 가게 됐습니다."

승 대표에게 오스트리아라는 각별한 나라다. 건축이라는 일에 목숨을 걸어도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사건'이 그곳에서 벌어졌다. "아돌프 로스라는 건축가를 처음 알게 되고 그가 건축한 로스 하우스를 봤을 때 전율이 일었습니다. 건축으로도 혁명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2년 만에 다시 돌아왔죠. 새로운 건축을 하고 싶어서…."

다시 공간연구소로 돌아온 그는 김수근 선생이 돌아가신 후 3년간 대표직을 맡았다 1989년 독립한다. 하지만 곧 예상하지 못했던 벽에 부딪힌다. "15년간 김수근 건축만 하다 나와서 승효상 건축을 해야 하는데 내가 누군지를 모르겠더라고요. 정말 당황스러웠습니다."

승효상 건축을 찾지 못해 방황하던 시절 그를 도운 것이 당시 30~40대의 신진 건축가들로 결성된 4ㆍ3그룹이었다. 매달 한 번씩 모여 한국 건축의 담론을 만들어가며 혹독하게 스스로를 단련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1992년 4ㆍ3그룹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전시회에서 그가 던진 화두가 '빈자의 미학'이고 그것을 기조로 한 첫 작업이 유홍준 명지대 교수의 자택인 '수졸당'이다.

승효상 건축을 시작한 지 20여년 동안 그는 수많은 작업을 했지만 그는 여전히 수졸당을 가장 의미 있는 작업으로 꼽는다. "내가 얼마나 와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기점이기 때문에 가장 의미가 있습니다. 정말 실수투성이고 쳐다 보기 싫은 점도 있지만 어쩔 수 없이 봐야 하는 건물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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