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자본에도 국적은 있다'

자본에 국적이 있는가, 없는가. 누군가에게 이 같은 질문을 한다면 상대방은 질문을 한 사람을 영락없이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못 좇아가는 지진아’이거나 ‘세계관이 몹시 편향돼 있는 국수주의자’쯤으로 바라볼 것이다. 국가 외환위기 이후 최근까지 ‘자본에는 국적이 없다’는 생각은 우리 사회의 보편적인 것으로 자리 잡고 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물론 개인적인 자리에서도 ‘자본의 국적’은 더 이상 고민의 대상이 아닌 것으로 치부되고 있다. 하지만 10년 가까이 굳어졌던 이 같은 상식에 대해 앞으로는 근본적인 의문부호를 달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주 말 중국 자본이 매입한 반도체기업 비오이하이디스가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신청 사유는 운전 자금 부족. 적자는 늘어나는데 돈이 없어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겠다는 것이 대강의 줄거리다. 비오이하이디스와 관련한 저간의 사정을 한꺼풀씩 벗겨낼 때마다 이번 법정관리 신청은 ‘피치 못할 사정’ 때문이 아니라 ‘의도적인 자살’이라는 의혹을 떨쳐내기 힘들다. 비오이그룹은 지난 2003년 하이디스를 인수할 당시부터 ‘부실화된 기업의 경영 체질이나 수익구조를 개선시켜 비오이그룹의 새로운 수익창출원’으로 만드는 데 관심을 가졌다고 보기 힘들다. 그보다는 하이디스가 갖고있던 기술ㆍ인력ㆍ노하우 등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의 정황만 놓고 본다면 마치 ‘기업이라는 생명체’를 책임지겠다고 나선 것이 아니라 심하게 표현해서 ‘그 생명체의 핵심이 되는 간ㆍ심장ㆍ콩팥’ 등의 이식이 필요해서 매입했다고 보일 정도다. 96년 당시 대우그룹은 프랑스 방위산업의 대표적인 공기업인 톰슨사의 가전소그룹 톰슨멀티미디어를 단돈 1달러에 매입하기로 했었다. 톰슨은 과도한 부실로 더 이상 버티기 힘겨운 상황이었고 유럽시장을 공략하고자 했던 대우그룹은 현지 인지도ㆍ판매망 등 거점이 필요했었다. 양측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면서 계약은 매끄럽게 진행됐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프랑스 정부는 ‘국가의 자존심을 판다’며 크게 반발하는 여론을 의식해 대우와의 거래를 성사시키지 못했다. 그뿐 아니라 프랑스 정부는 심지어 1년 후인 97년 톰슨사 민영화 원칙으로 ‘인수 기업은 프랑스 기업으로 제한한다’는 기준까지 만들었다. 당시 톰슨사 인수에 관심을 보이던 영국 기업들까지 응찰 자격을 얻지 못해 ‘프랑스의 외국기업 차별 문제’가 국제사회의 이슈로 떠오를 정도였다. 프랑스가 극단적으로 ‘자본의 국적’을 수면 위에 올렸다면 우리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자본의 국적’을 무시해왔다. 하이디스를 비오이그룹에 매각할 당시에 잠시 자본의 국적 문제를 고민했지만 그뿐이었다. 매각 이후의 후유증에 대해 우려하는 시각도 있었지만 그렇게 돼도 어쩔 수 없다는 식의 ‘미필적 고의’가 다분했다. 문제는 하이디스 하나로 그치지 않을 것이란 점. 우리 경제의 환경을 살펴볼 때 앞으로도 크고 작은 부실기업들이 자본의 국적을 따지지 않고 매각될 가능성이 높다. 모범적인 외국자본을 만난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국가 경제는 물론 사회적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가야 한다. 비오이하이디스의 사례처럼 ‘장기 매매식 기업 거래’가 발생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면 우리도 프랑스처럼 ‘자본의 국적’에 대해 좀더 정교한 잣대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사족이지만 톰슨사는 민영화 7년 후부터 경영 정상화에 성공해 지금껏 ‘프랑스의 자존심’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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