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씨 타계] 2. 인생역정

소양강댐·경부고속도로 건설 끝없는 도전정주영의 인생은 한마디로 '신화'다. 대부분의 재벌총수들에 대한 평가가 그렇듯 특히 그에 대한 평가는 여러 가지다. 극단적인 면도 많다. 하지만 한가지는 분명하다. 그가 온갖 역경에 굴하지 않고 보여준 '끈질긴 도전정신'과 '긍정적인 삶의 철학'은 현대가 처한 상황과 관계없이 올바른 평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1915년 강원도 통천의 아산(현재 북한관련 사업을 총괄하는 아산과 현대의 병원재단인 아산재단의 이름은 여기에 기원을 두고 있다)에서 태어난 그는 청운의 뜻을 품고 네 번의 가출을 시도한 끝에 성공(?), 인천을 거쳐 서울에 정착하게 됐다. 쌀 도매상(복흥상회)에서 배달꾼으로 일하다 주인의 눈에 들어 좋은 조건으로 이 가게를 인수한 것이 1937년. 가게 이름을 '경일상회'로 바꾸고 한창 뻗어나가던 쌀도매상은 일제가 곡물유통을 제한하면서 문을 닫게됐다. 이때 그는 본격적인 사업자의 길로 접어든다. 1940년에 만든 '아도(Art)서비스'로 자동차 수리공장이다. 43년 일제의 기업정리령에 따라 문을 '예술적으로 수리'를 한다는 뜻의 아도서비스도 문을 닫게됐다(두번의 의욕적인 사업은 모두 일본인에 의해 좌절을 겪게된다. 그래설까. 그는 다른 기업인들과 달리 일본과 별다른 인연을 맺지 않는다. 현대의 오늘은 47년 현대토건사(50년 1월 현대건설로 이름을 바꾸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의 설립. 앞서 세운 현대자동차공업사와 토건을 합친게 현대건설이다. 현대와 정주영의 이름을 높인 공사는 소양강댐 건설. 67년 공사를 시작해 73년 완공까지 6년6개월이 걸렸다. 이것은 75년 이후 중동진출의 밑거름이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단군이래 최대 공사였던 경부고속도로에서는 현대가 전체 공정의 40%를 맡았다. 68년 2월1일 첫 발파로 시작된 경부고속도로는 수도권과 영남 공업권을 연결시키고 전국을 일일 생활권으로 바꿔 놓을 수 있는 산업의 대동맥이었다. 그의 도전은 이어졌다. 고속도로 공사 기간중이었던 67년12월 포드와 제휴, 자동차 제작에 뛰어들었다. 68년5월에 공장건설을 시작해 6개월만인 11월에 첫 차인 '코티나'를 생산했다. 76년1월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독자모델 1호인 '포니'를 탄생시켰다. 정주영은 조선소를 건설하면서 배를 함께 만든 것으로도 유명하다. '배는 땅에서 집을 짓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단순한 생각으로 밀어붙여 새로운 역사를 만들었다. 중화학공업 붐을 일으키는 계기가 됐다. 72년3월 현대조선소 기공식이 열렸고 2년3개월만인 74년6월에 조선소 1단계 준공과 유조선 2척을 동시에 건조하는데 성공했다. 최단시일에 조선소를 건립하면서 배를 함께 건조한 기록으로 세계 조선사에 남게 된다. 정주영의 일생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사업이 중동진출이다. 73년 1차 오일쇼크로 국내경제가 어려워 지자 "돈을 벌기 위해서는 돈이 많은 곳으로 가야한다"고 생각, 75년 바레인 아랍 수리조선소와 사우디 해군기지 해상공사를 시작으로 중동진출을 본격화 했다. 그중 사우디 주베일항 공사는 백미였다. 76년 수주당시 공사금액은 같은 해 우리나라 예산의 절반에 해당하는 4,600억원이었다. 세계적인 건설업체들이 모두 참여한 가운데 낙찰자로 선정되기 까지의 과정은 한편의 드라마였다. 그는 정치참여에 나서면서 인생 최대의 시련을 겪게 된다. 92년1월 창당준비위원회를 결성한 통일국민당은 그해 3월 실시된 총선에서 31석을 차지하는 대약진을 했으나 대통령선거에서 패배하면서 연금생활과도 같은 탄압을 받게 된다. 정주영의 말년은 대북사업에 집중된다. 그는 98년6월 500마리의 소떼를 이끌고 판문점을 거쳐 평양으로 향했고, 그 해 가을부터 금강산 관광길을 열었다. 분단된 조국의 땅과 바다를 연결하는 초석을 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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