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율 1020… 심리적 지지선 무너지나]경제체력 보다 강한 원화… 한국 '안전통화의 저주' 우려

경상수지 흑자 확대도 통계가 부른 착시효과
수출채산성 이미 악화… 중기는 손해보며 장사
세계경제 호황 누리던 금융위기전 원高와 달라
고령화·내수붕괴 따른 일본식 불황 빠질수도



원화 강세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한국이 '안전통화의 저주'에 걸리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안전통화의 저주(curse under safe haven)'란 지난달 서울경제신문 주최 서울포럼에 참석했던 배리 아이켄그린 교수가 만든 용어로 안전자산으로 인식된 통화가 강세를 이어가 해당 국가의 경제에 악영향을 미치는 현상을 말한다. 엔화 강세로 수출기업이 타격을 입고 결국 디플레이션에 빠졌던 일본이 대표적인 예다. 한국의 경우 연초 대비 원화 가치가 3.4% 절상됐을 만큼 단기간에 통화가치가 급등했다. 그러나 실상 경제체력은 원화절상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괴리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지금까지 한국 경제는 '원화 약세에 따른 수출실적 개선' 혹은 '원화 강세에도 불구하고 세계 경제 호황에 따른 수출실적 개선'으로 위기를 비교적 쉽게 넘어왔다. 하지만 이제는 세계 경제회복 속도가 더딘 가운데 원화 강세를 극복해야 하는 상황이 닥쳤다. '가보지 않은 길' 앞에 선 것이다.

◇환율, 경제체력과 괴리 커지나=최근 수출과 환율의 방정식은 확실히 과거와 달라진 양상이다. 원·달러 환율 급락에도 불구하고 지난 1~4월 누적 경상수지 흑자 규모는 222억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150억1,000만달러)보다 70억달러 이상 늘었다. 사상 최대치를 기록한 지난해 경상수지 흑자기록(789억8,000만달러)보다 올해 전망(680억달러·한국은행)이 낮은 점을 감안하면 수출이 예상보다 호조를 보이고 있다.

투자시장에서도 한국물의 인기는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외국인들은 올 들어 코스피시장에서 1조2,411억원어치를 순매수했으며 채권시장에서도 4월 말까지 1조3,430억원을 순투자했다. 선진국의 미약한 회복세와 일부 신흥국의 불안이 맞물리면서 한국이 투자 대안처로 각광 받은 것이다.

그러나 최근 원화 강세에 가속도가 붙는 것은 수출과 투자시장에서 달러가 밀려들어오는 일시적인 현상보다 구조적 영향 때문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우리나라가 일본처럼 고령화와 내수 기반 붕괴에 따른 '안전자산의 저주'에 걸렸다는 것이다.

골드만삭스는 최근 한국의 경상수지 흑자가 고령화에 따른 구조적 변화에 기인한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보고서는 "한국의 경상수지가 지난 2년간 국내총생산(GDP)의 1.2%에서 5.6%로 증가했는데 대략 2%는 해외 직접투자와 포트폴리오 투자 때문"이라고 지목했다. 보고서는 "한국의 베이비부머가 저축을 늘릴수록 한국도 일본처럼 해외투자가 늘어날 것"이라며 "상대적으로 낮은 해외자산 비중, 지정학적 리스크 등을 감안할 때 해외투자를 늘릴 요인이 충분하다"고 내다봤다.

금융연구원도 최근 경상수지 확대의 착시효과를 경계했다. 경상수지통계의 국제적 기준 변화와 불황형 무역수지 흑자, 해외투자 확대에 따른 이자· 배당수입 증가 등에 힘입은 것이라는 지적이다. 한마디로 거품이 꼈다는 의미다. 박성욱 금융연 연구위원은 "내국인의 증권투자 확대는 인구구조 변화 등으로 해외 증권 수요가 확대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 "민간소비·설비투자 등 내수부진에 따라 수입이 둔화되면서 경상수지 흑자가 확대됐다"며 "이를 우리 경제의 활력이 저하된다는 신호로 봐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고 지적했다.

◇고령화·내수부진, 일본 전철 밟을까='안전자산의 저주'는 본래 엔화 강세의 덫에 걸린 일본 경제를 일컫는 말이다. 한국이 일본처럼 '안전자산의 저주'에 걸릴지를 놓고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한국이 일본을 닮지 않았다는 근거로 가장 많이 드는 것은 우리나라 대기업의 수출경쟁력이 과거와 많이 달라졌다는 점이다. 하지만 내부사정을 들여다보면 원화 강세에 따른 수출기업들의 채산성 악화는 이미 현재 진행형이다. 특히 중소기업들은 손실을 보면서도 거래처만 간신히 유지하는 상황이다.

2000년대 중반처럼 원화 강세에 힘입어 내수시장이 탄력을 받을 것이라는 기대도 나오지만 당시와 달리 한국 경제의 내수시장은 취약하기 짝이 없다. 무엇보다 글로벌 금융위기 전까진 부동산 시장이 활황기였다. 고용시장 역시 부동산·금융 부문을 중심으로 채용이 활발했다. 현재 정부가 다양한 서비스업 활성화 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내수시장을 주도할 만한 뚜렷한 업종이 안 보인다. 인구구조 고령화에 따라 내수부진은 심화될 가능성이 더 높다. 그나마 해외투자자산이 많은 일본과 그렇지 않은 우리나라는 경상수지구조 자체가 다르다는 주장도 급속한 고령화에 따른 자산구조 변화로 설득력이 떨어지고 있다.

물론 올 하반기 미국의 테이퍼링(양적완화 축소)이 종료되고 금리 인상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원화가 다시 약세로 돌아설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하지만 이 역시 낙관론일 수 있다. 권구훈 골드만삭스 전무는 "하반기 달러 강세를 예상하는데 생각보다는 강도가 낮을 수 있고 설령 강달러로 가더라도 원화 강세가 너무 진행된 뒤라 그 수혜를 많이 못 입을 가능성도 있다"며 "저물가·저성장 등 구조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단순히 2000년대 중반 원·달러 환율이 900원이던 시절도 괜찮았다는 인식은 굉장히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경쟁국인 일본의 반격도 무시할 수 없다. 한국은행의 한 관계자는 "아베노믹스로 인한 엔저효과에도 일본 기업 대부분이 수출가격을 낮추기보다 벌어들인 돈을 연구개발(R&D)에 투자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며 "당장은 한국 기업이 수출시장에서 선전하더라도 몇 년 뒤 체력이 쌓인 일본 기업의 반격이 시작되면 한일 기업의 판세가 뒤집힐 수 있다"고 말했다.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