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장성이 만주와 한반도에도 있었는지가 중국학계와 한국학계의 첨예한 논쟁거리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만리장성을 중국(한족)과 이웃나라의 경계로 보는 인식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만주에는 중국인들이 건설한 요새가 있었지만 이를 '장성'으로 볼 수 없고 한반도 안에는 전혀 없었다.
만리장성의 만주존재설을 주장하는 측의 근거는 '사기'에 한나라의 고조선 정복 이후 요동까지 장성을 쌓았다는 기록이다. 고조선의 근거지는 지금의 랴오닝성 선양 부근으로 보인다. 당시 한나라의 주된 적은 북방 유목민족인 흉노족으로 이들의 양팔을 자르는 전략으로 나왔다. 서쪽으로는 하서회랑을 정복해 중앙아시아의 교통로를 장악하고 동쪽으로는 고조선을 침략해 만주와 한반도의 여러 국가들과 흉노 간 연계를 파괴하는 전략을 세웠다. 이후 하서회랑(중국명 河西走廊ㆍ허시주랑)에는 하서4군을, 만주에는 이른바 한4군을 세우게 된다.
한나라가 서부에서 하서회랑을 정복한 후 그 선을 따라 장성을 세운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지금 보는 것처럼 견고한 방벽이 아니었다. 일정한 거리로 성채와 봉수대를 세운 다음 이 주위에 흙벽을 세운 데 불과했다. 허베이성에서 만주의 고조선 영토까지의 장성도 그런 수준이었을 것이다. 고조선까지의 교통로를 확보하는 게 최우선이기 때문이다.
이후 당나라ㆍ송나라 시대를 거치면서 장성은 사실상 쓸모 없어지고 지금 보는 장성 모양이 나타난 것은 명나라 때다. 명나라는 서쪽 하서회랑의 중간 정도인 가욕관에서 동쪽 산하이관까지 지금 우리가 보는 벽돌로 된 완전한 형태의 만리장성을 쌓았다. 특히 베이징을 싸고도는 장성 구간을 더 철저하게 하기 위해 친황다오시에서 동쪽 끝 바다와 만나는 구역의 노룡두(老龍頭)에서는 장성 일부가 바닷속으로 들어가도록 만들었다.
만주에 세웠다는 장성은 이런 모양이 아니다. 역시 주요 거점마다 세운 요새와 이를 에워싼 성벽들의 연속에 불과했다. 그렇기 때문에 만주에는 자위이나 산하이관 같은 관성이 전혀 없다. 이후 후금(청나라)과의 전투에서 명나라 만주장성은 이야깃거리가 되지 못했다. 장성이 만주에는 없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