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치로 문을 부수고 소화기를 뿌렸던 2009년 같은 사태는 없었다. 대신 ‘추하다’, ‘국민 보기에 부끄럽지도 않느냐’ 등 거친 말이 서로 부딪쳤다.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놓고 31일 벌어진 일이다.
한나라당 소속인 남경필 외통위원장이 이날 오후 5시 전체회의를 소집하자 제일 먼저 이정희 민주노동당 의원이 회의장에 달려왔다. 그러나 위원장 측은 회의장을 잠가 놓아 이정희 의원은 회의장과 붙어있는 위원장 실을 지켰다. 5시 10분께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는 남 위원장을 비롯한 한나라당 소속 외통위원을 불러 상임위 처리를 일임했다.
이에 정동영 민주당 의원 등 외통위 소속 민주당 의원들과 강기갑 의원 등 민노당 의원들이 회의장 앞으로 집결했다. 회의장은 여전히 잠겨 있었지만 야당 의원들은 만약을 대비해 회의장과 연결된 소회의장을 비롯해 위원장 실과 비서실을 지켰다. 6시가 넘어가면서 이상득 의원 등 한나라당 소속 외통위원도 외통위 회의장 앞으로 모였다. 40여명의 여야 의원들은 누구도 회의장에 들어가지 못한 채 회의장 앞에서 “회의를 열게 해달라”(남경필 위원장) “강행처리 하려고 그러느냐”(야당 의원)이라고 옥신각신했다. 야당의원이 여당 의원보다 많은 데다 몸싸움을 하면 19대 총선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남 위원장 등 여당 의원들은 몸을 쓰진 않았다.
7시께 남 위원장이 국회 경위를 불러 회의장을 통제하는 ‘질서유지권’을 발동하면서 강행처리하는 게 아니냐는 긴장감이 돌았다. 그러나 7시 20분께 땀에 젖은 남 위원장이 먼저 위원장 실을 나와 기자들에게 “국민 보기에 부끄럽지만 오늘 회의장을 야당이 에워싸서 진행할 수 없다”면서 “이게 민주당의 모습입니다 국민여러분”이라고 외쳤다. 남 위원장은 "물리적 충돌이 있는 상황 속에서 비준안 강행처리를 하지 않겠다고 국민께 약속을 했고, 그래서 끝장토론을 1천500분이나 하고 공청회도 했다"면서 "야당의 요구를 모두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회의장을 이렇게 에워싸고 하는 모습을 국민이 도저히 납득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 "어젯밤 원내대표 등 여야의 책임있는 지도부가 모여 한미FTA 합의문에 서명했고, 거기에서 민주당 요구중 단 하나 ISD(투자자국가소송제도)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면서 "민주당이 비겁하다. 노무현 정부 당시 ISD가 잘됐다고 했던 분들이 지금 와서..."라며 민주당을 비판했다.그러자 주변에 있던 야당 소속 당직자들은 “우우…남경필 추하다”, “그렇게 19대 총선에 나가고 싶나”고 비아냥거렸다.
남 위원장이 떠난 후 정동영 의원이 민주당 의원들과 강기갑 민노당 의원 등과 함께 “ISD는 애국이냐 매국이냐를 결정짓는 것”이라면서 “참여정부 때 외교부가 대통령과 여당을 속였다”고 주장했다. 정 의원은 또 “이명박 정부는 노무현 정부의 경제ㆍ복지ㆍ남북대화ㆍ민주주의 정책은 뒤집으면서 노무현 정부가 잘못 판단한 ISD는 처리하나”라면서 “ISD는 애국이냐 매국이냐를 결정짓는 것. ISD를 유보하고 상정하면 표결처리하겠다”고 말했다.
임세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