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병기해야
중·고교 땐 입시에 밀려 뒷전
이미 초교 98% 한자교육 도입
그만큼 현장에서 필요성 느껴
●정부 원칙에 역행
국민 합의 없이 정책 뒤엎는 것
꼭 익혀야할 한자어 많지않고 교원들도 3명 중 2명 "부정적"
지난해 9월 문과와 이과 교육을 통합하는 내용을 담은 '2015 문이과 통합형 교육과정의 총론 주요사항(시안)'이 공고된 후 통합 교육안 자체보다 더 주목받는 교육 정책이 등장했다. 당시 발표에 포함된 '한자교육 활성화 방안'으로 시안에는 '초·중·고 학교급별로 적정한 한자 수를 제시하고 교과서에 한자 병기의 확대를 검토한다'는 단 한 줄이 들어갔다. 하지만 이 한 줄이 불러온 파장은 컸다. 논란이 불거지자 교육부는 초등 3학년 이상 교과서에 한자 400~500자를 병기하겠다는 내용이라는 답변을 내놓았다.
그러나 지난 1970년 이후 46년째 지속돼온 초등 교과서 한글 전용 정책을 별다른 국민적 합의 없이 뒤엎는 것은 불가하다는 주장과 풍성한 어휘 활용을 위해 이미 98%의 초등학교에서 실시 중인 한자 교육을 제도화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은 여전히 합의점을 찾지 못한 채 팽팽히 대립하고 있다. 교육부는 공청회 등을 거쳐 올해 9월께 초등 교과서 한자 병기 문제를 최종 확정 고시한다. 이를 둘러싼 교육 각계의 논란과 방향성을 짚어봤다.
우리 초등학교 교과서는 1970년 이후 46년째 한글 전용 방침을 유지하고 있다. 이 때문에 초등 교과서 병기를 반대하는 쪽에서는 우선 이번 정책 추진을 한글을 국가 문자로 정해 초등과정 교육을 실시해온 정부 원칙과 기준을 뒤엎는 정책 변경이라며 극명히 반대하고 있다. 현재 중·고교에서도 선택교과로 가르치게 돼 있는 한자와 한문을 국민적 합의도 없이 초교 교과서에 도입하고 모든 교과서에 병기하도록 하는 것은 국가의 문자 정책을 바꾸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특히 이들은 '공공기관 등의 공문서는 한글로 작성해야 한다'는 국어기본법 제14조를 교육부가 나서 위반하는 것이라는 지적도 내놓는다. 1990년대 초 '한글전용을 기본으로 하고 한자를 모든 학생에게 가르치지 않는 것은 위헌'이라는 한문 단체의 헌법소원을 헌법재판소가 이미 기각한 점도 들고 있다.
한자 교육이 필요하다고 해도 초등학교 단계에서부터 도입하는 게 옳은가 하는 논란도 제기된다. 결국 초등학교의 수업 분량만 늘리고 학교 교육을 과거의 단순암기교육으로 회귀하게 하며 사교육만 부채질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초등국어교육학회 회장인 이창덕 경인교대 교수는 "초교에서 가르치도록 고려한다는 400자 정도는 중고교에서 한두 주 사이에 배울 수 있는 분량"이라며 "초등 수준에서 꼭 읽혀야 할 한자 어휘는 많지 않고 굳이 한자로 표기할 필요도 없는 반면 병기가 시작되면 초등 교과 내용을 배우는 데 필요한 시간을 한자 교육에 빼앗기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한국초등국어교육학회가 초등 교원 1,000명을 대상으로 올해 초 실시한 조사에서도 한자 병기에 관한 부정적 여론이 확인된다. 교원들의 65.9%는 초등 교과서 한자 병기를 부정적이라고 본 반면 찬성한 교원은 33.6%에 그쳤다. 교원의 94.1%가 학생의 학습부담이 늘어날 것을 우려했고 96.1%는 유치원·초등학교 학생들의 한자급수시험 응시가 늘어날 것이라 답했다.
쉽고 간결한 우리글로 쓰여온 초등 교과서 정책을 되돌리는 것은 과거 회귀라는 지적도 있다. 한자 종주국인 중국에서도 간체를 만들어 쓰는데 우리나라에서만 옛 한자를 쓴다는 것을 이해하기 힘들고 국제 학술지나 새로이 생기는 말의 대부분이 영어인 점 등도 고려하지 못한 방안이라는 것이다.
반면 초등학교 한자 교육을 도입하자는 측에서는 풍성한 어휘 생활과 한자 병기에 국가 사회적 요구 등을 들어 초등 교과서의 한자 병기 추진을 찬성하고 있다.
실제 교육부에 따르면 전국 초등학교 가운데 한자 교육을 도입한 학교는 지난해 기준으로 98%에 달했다. 서울의 경우 598개 전체 학교에서, 부산도 395개 전체 학교에서 한자 교육을 실시하는 등 전국 5,930개 초등학교 중 98%에 달하는 5,809개 학교가 한자교육을 도입하고 있다. 주당 2~3시간 내외인 창의적 체험활동 시간 중 한자수업을 편성한 학교는 80.7%였고 교과 시간과 연계해 교육하고 있는 학교도 48.2%였다. '한자급수제'와 같은 특색활동을 도입한 학교도 40.7%에 달했다. 그만큼 한자 교육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한자 교육에 나서는 초등학교가 상당한 셈이다.
전국한자교육추진총연합회는 "우리말 어휘의 70% 이상이 한자어로 돼 있는 데다 한자 어휘의 90% 이상이 두 가지 이상의 동음 이의어로 돼 있어 한글 한자를 함께 쓰면 높고 깊은 지식을 갖출 수 있다"며 "한자 병기는 학문과 언어소통 위한 최소한의 조치"라고 말했다.
이들은 국립국어원에서 발간한 표준대사전에 실린 표제어 51만개 가운데 한자어가 58.5%로 고유어 25.5%보다 두 배 더 많은 점 등을 강조한다. 사회와 과학 등 새로운 교과를 통해 학습량이 많아지는 시기에 한자 병기를 도입한다면 자연스럽게 뜻을 이해할 수 있어 학습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글 전용정책이 추진된 후 한자어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일부 언어 소통에 제한을 받고 있는 상황을 고려한다면 한자 병기의 필요성을 간과할 수 없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입시 부담이 큰 중·고교에선 한문 과목이 있어도 배우기 힘든 만큼 입시와 떨어져 있는 초등학교에서 한자를 함께 가르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주장도 있다. 또 이들은 적정한자 수에 대한 규정이 없어 초등 수준을 벗어난 어려운 한자 학습과 사교육이 유발되는 점도 되레 막을 수 있다고 본다. 병기의 방법도 한글 단어 다음에 괄호로 표시하는 것 외에 한글 글자의 위아래에 작게 표기하는 등 읽기 활동에 제한을 두지 않는 가운데에서도 다양한 방법이 가능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교총도 "사교육 증가가 이뤄지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한자 병기를 추진한다면 학생들의 국어이해 증진과 인성교육에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실제 한국초등국어교육학회의 교원 대상 설문조사에서도 한자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는 응답은 7.4%에 그쳐 한자 교육의 필요성에 사회적 인식이 담보돼 있음을 드러냈다. 다만 정규 교과서에 포함해야 한다는 응답 역시 5.8%에 그쳐 한자를 가르치되 언제, 어떻게 가르쳐야 할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함을 드러냈다.
한 교육계 관계자는 "초교 기본 어휘 결정에만 10여년을 소요한 호주의 예처럼 병기가 필요하다면 어느 시점에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등에 관한 전문가들의 중장기 연구가 선행돼야 한다"며 "풍성한 어휘생활을 위한 기본 취지가 흐려지지 않도록 사회적 합의를 거쳐 제도 시행에 나서는 게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