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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구 장충단로에 자리한 두산그룹 본사 30층 집무실에 가면 파란 눈의 외국인 최고경영자(CEO)를 만나볼 수 있다. 주인공은 그룹 지주회사인 ㈜두산의 사업부문을 책임지고 있는 제임스 비모스키 부회장. 그는 지난 2006년 세계적 컨설팅 회사인 맥킨지를 떠나 두산의 새 식구가 됐다. 외국인이 국내 대기업의 대표이사에 오른 것은 비모스키 부회장이 처음이었다. 그 후로 8년이 지났지만 그는 여전히 두산의 외국인 CEO로서 왕성히 활동하고 있다. 한국인 CEO도 3년 이상 버티기 어려운 현실에서 외국인이 10년 가까이 자리를 지킨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현대·기아차의 디자인을 총괄하는 피터 슈라이어 사장도 올해로 9년째 외국인 임원으로 장수하고 있다. 세계 3대 자동차 디자이너로 꼽히던 그는 2006년 기아차 디자인 총괄담당 부사장으로 영입돼 'K5'로 대표되는 기아차의 디자인 혁신을 이끌었다. 이러한 성과를 인정받아 그는 지난해 현대차그룹 역사상 최초의 외국인 사장에 올랐다.
제임스 비모스키와 피터 슈라이어는 국내 기업들 사이에서 외국인 인재 영입의 대표적인 성공사례로 통한다. 탁월한 글로벌 감각을 무기로 자신의 전문성을 살려가며 한국 기업의 조직문화에도 잘 적응한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사례가 다른 모든 기업들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저마다 글로벌 기업을 꿈꾸며 많은 공을 들여 해외 인재들을 영입해오지만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한 채 한국을 떠나는 일이 적지 않다. 실제로 수년 전 국내 한 대기업으로 대거 영입됐던 글로벌 기업 출신의 외국인 임원들은 3년도 안 돼 짐을 쌌다. 또 다른 대기업에 스카우트됐던 외국인 여성 임원은 재계약이 거부되자 회사를 상대로 해고 무효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화려한 명성보다는 실속 있는 인재=한국에도 외국인 임원 시대가 열렸지만 아직까지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지 못하면서 기업들의 외국 인재 유치 전략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고액 연봉을 주고 어렵사리 한국에 모셔왔지만 정작 이름값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늘면서 기업들도 외국인 인력을 바라보는 눈높이를 점차 낮추고 있다. 한 대기업 임원은 "베스트(best) 피플보다는 실제 근무에 적합한 라이트(right) 피플을 뽑는 게 더 실용적"이라고 말한다.
헤드헌팅 전문업체 HR코리아의 황소영 상무는 "국내 기업들이 외국 인재 영입에 있어 과거에는 '보여주기식' 유치가 많았는데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접근방식이 달라졌다"며 "실제 일할 수 있는 포지션(직책)이나 사이트(근무지)를 최우선적으로 고려해 채용을 진행하는 추세"라고 전했다.
실제로 최근 삼성·현대차·SK·LG 등 국내 주요 대기업에서 근무하는 외국인 전문인력 가운데 부사장급 이상의 고위임원은 찾아보기 힘들다.
정유민 브리스크&영 사장은 "최근 국내 기업들도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는 고액 연봉의 스타급 고위임원을 채용하기보다는 잠재력 있는 중간 직급의 인력을 뽑아 직접 키우는 방향으로 해외 인재 채용 스타일이 바뀌고 있다"고 분석했다.
◇해외 인재는 현지 근무 쪽으로 전략 수정=좋은 처우에도 불구하고 정주여건과 낯선 문화에 대한 거부감 등으로 한국 근무를 꺼리는 외국인 전문인력을 고려해 해외 현지 근무 비중을 높이는 기업들도 늘고 있다. 삼성그룹의 외국인 용병부대로 불리는 '글로벌전략그룹(Global Strategy Group·GSG)'이 대표적인 사례다. 글로벌 최상위권 대학의 MBA 과정을 마친 젊고 똑똑한 외국 인재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GSG는 출범 초기만 해도 그룹 내 주요 사업에 대한 컨설팅을 제공하는 게 주 업무였다. 하지만 1997년 20여명으로 시작한 조직이 300여명까지 늘어나자 삼성은 이들을 주요 해외법인이나 지사로 보내 현지 거점의 리더로 육성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정했다.
태양광을 미래 먹거리 사업으로 육성하고 있는 한화그룹은 2012년 미국 실리콘밸리에 국내 기업으로는 처음으로 태양광 연구소인 '한화솔라아메리카'를 설립했다. 연구소장은 태양광 분야의 전문가인 크리스 이버스파처 박사가 맡았으며 연구진은 실리콘밸리 현지에서 직접 채용한 인력들로 이뤄졌다.
국내 한 대기업의 해외 인력 채용 담당자는 "아직까지 한국은 싱가포르나 일본·홍콩에 비해 외국에 덜 알려져 있어 외국인 입장에서는 아무리 좋은 조건이라도 한국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오는 데 대해 부담을 갖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우수 인재 확보 위해 M&A도 늘어=대규모 전문인력이나 영입하기 어려운 우수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 인수합병(M&A)에 나서는 경우도 적지 않다.
SK하이닉스는 2012년 SK그룹에 인수된 후 지금까지 5건의 M&A를 통해 해외 낸드플래시 관련 업체들을 대거 사들였다. 기존 주력 사업인 D램에 비해 상대적으로 취약한 낸드플래시 사업을 강화하기 위한 포석이다. SK하이닉스가 이들 기업의 인수를 결정하기에 앞서 가장 눈여겨본 것 가운데 하나는 해당 기업에서 일하는 우수 인력들이었다. SK하이닉스 관계자는 "M&A를 통해 확보한 해외 우수 인력들을 잘 활용해 낸드플래시 사업 강화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한화그룹은 2012년 독일의 태양광 업체인 큐셀 인수를 통해 해외 생산 및 영업 거점은 물론 250명의 수준 높은 연구개발(R&D) 인력도 확보할 수 있게 됐다. 독일 R&D센터에서 일하는 인력의 대부분은 태양광 관련 기술개발 경험이 5년 이상 되는 전문인재들이다.
거침없는 M&A를 통해 외국인이 전체 직원의 50%를 차지하고 있는 두산그룹은 아예 해외 임직원들에 대한 인사정책 등을 담당하는 GHR 조직을 별도로 만들어 관리하고 있다. 현재 두산의 해외 계열사 수는 119개로 국내(22개)의 5배가 넘는다.
정유민 사장은 "국내 기업들이 궁여지책으로 해외 법인 위주로 외국 인력을 고용하고 있지만 해외 법인은 생산이나 영업 거점의 역할에 국한될 수밖에 없다"며 "결국 보다 전략적이고 핵심적인 업무에 외국 인력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국내 본사로 영입하려는 노력이 병행돼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