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씨는 국내 태양광 폴리실리콘 사업의 선두주자로 꼽히는 A사에서 폴리실리콘 공장의 건설과 시운전, 생산 등을 담당하는 요직에 종사하다 업계 후발주자로 뛰어든 B사가 적극적으로 접근해 오자 2013년 초 이직을 결심했다. H씨는 A사와 “퇴직 후 2년간 동종업계 또는 경쟁업체에 취업하거나 설립·운영하지 않겠다”는 전직 및 경업 금지 약정을 맺었기에 B사로 간다는 사실은 숨겼다. 그러나 H씨의 이직은 곧 발각됐고 회사의 영업비밀이라고 볼 법한 주요 자료들도 가져간 사실이 드러났다. A사는 같은 해 4월 H씨를 산업기술유출 혐의로 고소하는 한편 전직 금지를 구하는 가처분 신청을 광주지법에 냈고 재판부는 지난 2월 이를 받아들였다. 광주지법 민사21부(박병칠 부장판사)는 “H씨는 A사에서 상당한 권한을 부여받아 회사에 축적된 정보와 노하우를 취득할 수 있었으므로 전직금지가 필요한 지위에 있었다”며 “A사와 직접적인 경쟁관계에 있는 B사에 취업이 확정돼 있었음에도 이를 속이기까지 하고는 1년 넘는 기간 동안 B사에서 계속 근무하고 있는 점을 봐 전직금지 의무 기간을 앞으로 1년 6개월로 정한다”고 결정했다. 재판부는 H씨가 이를 지키지 않을 시 A사에 하루 100만원을 지급하라는 결정도 함께 내렸다.
# 개발도상국 기반산업에 필요한 물품을 납품하는 C사는 최근 업체간 납품 단가가 주요 경쟁 포인트가 되자 경쟁사 영업부서에서 근무하는 과장 P씨를 스카우트했다. P씨도 기존 회사와 전직 금지 약정을 맺었던 만큼 회사에는 C사로 간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고 퇴사 후 3개월에 걸쳐 조심스럽게 회사를 옮겼다. 하지만 곧 전 회사는 P씨의 이직 사실을 알아챘고 C사에 “P씨의 이직으로 불이익을 보지 않도록 퇴사 등 적절한 조치를 취해달라”는 내용증명을 보냈다. 다행히 P씨는 여러 소명을 통해 소송까지는 가지 않았고 퇴직도 피할 수 있었다. P씨는 “문제가 발생할 경우 C사에서 보호해주리라 기대했는데 동종업계에서 괜한 말이 나올 것을 염려해서인지 전혀 신경을 써주지 않았다”며 “괜히 나만 돈 때문에 약속도 어기고 회사를 옮긴 파렴치한이 됐다”며 씁씁해 했다.
최근 들어 기업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근로자들의 전직·이직과 관련한 분쟁도 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회사와 맺은 전직(경업) 금지 약정에 발목이 잡혀 전전긍긍하는 근로자들이 많아지는가 하면 분쟁의 종착점이라 할 수 있는 소송도 빠르게 늘어나는 추세다. 실제로 서울중앙지법의 경우 2006~2007년 무렵까지만 해도 연간 2~4건에 불과했던 ‘전직금지 가처분 신청사건’이 2010년 이후로는 매년 10건 이상 꾸준히 접수되고 있다. 공장·산업단지 등이 밀집해 있는 울산이나 광주 등의 지방법원에도 매년 적지 않은 수의 사건이 접수되고 있었다.
관련 분쟁이 늘어나는 이유는 무엇보다 업계간 경쟁이 치열해진 탓이다. 대형 로펌의 한 관계자는 “기술이나 고객관리, 판매망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만 부족해도 금세 뒤쳐지는 완전 경쟁시장이 많아지며 업계가 약간의 인력 유출에도 극히 예민해진 탓”이라고 설명했다. 헤드헌팅 업계의 한 관계자 역시 “엔지니어나 기술을 담당하는 부서나 거래 선을 갖고 있는 영업 쪽에서 이런 분쟁이 많이 발생한다”며 “특히 고위임원의 경우 분야를 막론하고 2~3년 등 장기간의 약정을 체결하곤 하는데 일례로 한 주류회사에서 퇴직한 모 임원의 경우 경업금지 약정을 지키기 위해 3년간 개인 사업을 하다가 다시 업계로 돌아오는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다.
해당 분쟁을 바라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법원은 기본적으로 우리 헌법에 명시된 직업 선택의 자유를 보장해 주는데 좀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아무리 개별 약정을 맺었더라도 그 약정이 지나치게 직업 선택을 제한할 경우는 인정해주지 않는 것이다. 일례로 지난해 말 서울중앙지법 민사50부는 액정표시장치(LCD) 패널 후면에 들어가는 광학필름을 생산하는 L사가 경쟁업체로 이직한 직원을 상대로 낸 전직금지 가처분 신청을 기각하는 결정을 내렸다. 재판부는 “L사와 직원이 맺은 약정은 ‘퇴직 후 5년 간 지역·직종을 불문하고 경쟁관계에 있는 회사로의 일체의 전직을 금지한다’는 것인데 이는 지나치게 근로자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라며 “전직 금지 기간은 1년이 적정하며 신청이 들어온 것은 해당 직원의 퇴사일이 1년을 넘은 시점이므로 이 신청을 기각한다”고 결정했다.
그러나 직원이 이직하는 과정에서 영업비밀 침해행위가 있거나 해당 근로자가 가진 정보가 경쟁 우위를 점하기 위해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인식할 경우 사용자 측의 손을 들어주는 경우도 많다. 특히 고급정보를 많이 보유한 고위임원의 이직에 대해서는 좀 더 엄격히 판단하는 경향이 짙다.
헤드헌팅 전문업체 HR코리아의 김유경 차장은 “기업간 경쟁이 치열해지는 한 이 같은 분쟁은 앞으로도 계속 일어날 수밖에 없다”며 “분쟁 발생시 피해는 이직을 결심한 근로자들이 고스란히 입게 되기에 스카우트를 해 간 회사 쪽에서 이를 적극적으로 보호해 줘야 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