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식적인 조사니까 형식적으로 답하겠습니다.”
한 스포츠 브랜드의 백화점 영업 담당자의 싸늘한 반응. 공정거래위원회가 유통시장의 해묵은 병폐인 유통사와 납품업체의 왜곡된 거래행태를 바로잡겠다며 내놓은 `무기명 설문조사`에 대한 제조업체들의 인식은 이 정도 수준이다.
공정위는 지난 14일 대형 유통사와 납품 및 임차 사업자 등 총 3,090사를 대상으로 `갑(甲)`의 위치인 유통사들의 부당한 횡포 내역을 제대로 파악, 시정하기 위해 처음으로 무기명 조사를 벌이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피해 내역을 신고한 납품업체들이 추후 유통사로부터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신고자의 얼굴을 가려주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막상 이를 환영해야 할 납품업체들의 반응은 `썰렁함` 그 자체다.
백화점에 납품하는 한 패션 브랜드 관계자는 “이러는 게 어디 하루이틀도 아니고…. 만약 유통업체가 공정위에 걸려도 벌금 내고 윤리강령이니 하는 홍보 좀 하고, 그러면 또 원상복귀죠. 무기명이라고 해도 설문 내용 보면 담당자들은 어느 업체인지 뻔히 아는데 누가 제대로 신고하려고 하겠어요.”라며 정부의 “행정 액션”에 뿌리깊은 불신감을 드러낸다.
식품업체 관계자들 역시 정부의 보호막이 할인점이나 편의점 등 유통업체들의 `맷집`을 당해내지는 못할 것이라고 단정짓고 있다.
“예전에 무리한 가격 할인 요구로 물의를 빚은 한 편의점의 경우, 언론에서 실컷 비난을 받아 사정이 좀 나아지겠거니 했는데 바로 다음날 `우리는 맞을 만큼 맞았으니 이제 그 쪽이 가격을 맞춰라`고 하는 식입니다. 정부가 아무리 으름장을 놓아도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이번 조사가 이처럼 힘으로 누르는 식의 잘못된 유통 관행을 하루아침에 바꿔놓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납품업체들에 깊숙히 인이 박힌 불신감을 조금 누그러뜨리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또 한가지. `을(乙)`의 위치에서 유통사들의 무리한 요구에 큰 소리 한 번 못 치고, 정부의 탁상행정에 실망을 거듭해 온 납품업체 입장에서 이 같은 불신감이 당연한 결과이긴 하다. 하지만 시작도 하기 전에 등부터 돌리면 정말로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신경립 생활산업부 기자 klsin@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