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서민→ 상생협력→공정사회→물가관리(가격통제)' 이명박 정부가 집권 후반기에 접어든 지난해 7월부터 그려온 통치의 궤적이다. 각 단계마다 맨 먼저 대통령이 화두를 던지면 정부 부처 장관들이 줄지어 한마디씩 거든 뒤 요란한 전시행정이 뒤따르는 절차가 반복되고 있다. 타깃은 모두 기업, 그 중에서도 대기업이다. 친서민ㆍ공정사회가 제기됐을 때 대기업 계열 캐피털사가 뭇매를 맞았다. 상생협력이 나오자 대기업 총수들은 줄줄이 청와대에 불려갔고 공정거래위원장은 대기업들을 돌며 공정협약 이벤트를 벌였다. 물가관리로 무대가 옮겨지자 공정위는 말할 것도 없고 기획재정부ㆍ지식경제부 등이 나서 정유사ㆍ통신사ㆍ식품ㆍ유통업체들을 향해 집중 포화를 날리고 있다. 정권이 출범하면서 내건 '비즈니스 프렌들리'와는 완전 딴판이다. 시작과 중간이 이렇게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학계와 업계에서는 현정부의 포퓰리즘 강화가 정치논리, 즉 정국 주도권 장악과 정권 재창출을 지상과제로 앞세웠기 때문이라고 파악하고 있다. 정치적 구호인 친서민을 위해 기업쯤은 희생해도 된다는 기업경시 풍토가 심화하고 있다는 진단이다. 정기화 전남대 교수는 "경제가 일시적으로 어려운 때는 기업도 정부에 협조해야 하는 상황이 있지만 지금은 정치적인 목적으로 기업활동을 제한하려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경제 문제는 경제로=특정 업종들에 대해 직접적인 가격통제를 하는 것은 '3% 물가상승률'이라는 목표달성보다 정치적 계산이 따로 있기 때문이라는 게 전문가들 시각이다. 사실 정부는 금리와 환율 등 거시변수를 조정해야 물가를 잡을 수 있다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한 대기업 고위관계자는 "우리나라 엘리트로 꼽히는 정부 관료들이 직접적인 가격관리로 기름 값을 잡을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다"며 "권력 핵심부의 의중에 따라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기업들은 잘 알고 있다"고 밝혔다. 휘발유ㆍ밀가루ㆍ우유ㆍ통신비 등 생필품 가격억제에 집중하는 것은 서민가계의 부담을 덜어주려고 노력한다는 친서민 이미지를 확산시키기 위한 노림수라는 분석이다. 경제 문제를 정치논리로 푸는 전형적인 포퓰리즘 행태인 셈이다. 김진국 배재대 교수는 "친시장적이고 친기업적인 정부를 표방했던 현정부가 오히려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반기업정서를 은근히 조장, 이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물가상승으로 서민들의 고통이 커지고 있다면 시장에 개입하지 않고 다른 수단으로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진단도 나온다. 정 교수는 "정부가 물가관리목표 자체보다는 서민가계에 부담을 주는 품목들을 직접 통제하려 한다"며 "서민 부담을 덜면서 시장을 교란시키지 않으려면 보조금과 같은 복지 시스템을 활용해야지 시장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잘라 말했다. 실제로 지난 2008년 유가가 배럴당 140달러를 넘어서며 국내 기름 값이 크게 오르자 정부는 보조금을 지급해 서민들의 어려움을 덜었다. 하지만 2년여가 지난 지금은 정유사의 이익축소를 통해 기름 값을 낮추려는 전혀 다른 해법을 구사하고 있다. 이 때문에 박리다매로 낮은 이익률을 기록하고 있는 정유사들이 심각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뿐만 아니라 기업환경이 불투명해지면서 대규모 설비투자 등도 엄두를 내기 힘들게 됐다. ◇초심으로 돌아가야='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내걸었던 현정부가 2년 만에 표변하기 시작해 경제현안이 생길 때마다 기업 때리기를 하자 기업들은 크게 실망하고 있다. 총선과 대통령선거가 다가오면서 이 같은 반기업 기조가 더 거세지지 않을까 우려하는 분위기도 역력하다. 처음 2년 동안 기업친화적 정책을 펼친 정부가 태도를 바꿔 '할 만큼 했으니 기업도 보답하라'며 날이 갈수록 주문의 강도를 높이면서 이제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라는 게 기업들의 호소다. 그동안 정부는 환율 등 거시경제 변수들을 대기업에 유리하게 유지해왔고 출자총액제한제 폐지 등 굵직한 규제완화를 해준 것이 사실이다. 이 때문에 지난해 9월 정부의 상생협력 주문이 본격적으로 쏟아져 나오자 전경련 고위관계자는 "재계가 그동안 정부로부터 받은 게 많다"며 "이 정도는 협조해줘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문제는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기 위해 시혜를 베풀듯 벌이는 단기 이벤트가 아니라 구조적 여건으로 자리를 잡도록 일관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시장경제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갖고 포퓰리즘의 유혹을 떨쳐버려야 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에 속한다. 이병기 한국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기업이 자유롭게 의사결정을 하고 혁신할 수 있는 환경을 지속적으로 만들어줘야 한다"며 "규제 전봇대를 뽑는다고 했던 초심으로 돌아가는 게 급선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