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00억여원에 달하는 채무를 갚지 못해 지난 1997년 8월 법정관리를 신청한 ㈜세모는 상당액의 빚을 탕감 받은 뒤 남은 2,800억여원을 10년에 걸쳐 갚기로 하는 회생계획안을 인가 받아 1998년 본격적인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그러나 회생계획 완료 시점이 코앞으로 다가온 2007년까지도 세모가 갚은 금액은 1,560억원선에 그쳤다. 회생계획안을 폐지하고 파산 절차를 밟느냐 제3자에게 매각해 최소한의 금액이라도 건지느냐의 기로에서 법원과 채권자들이 택한 것은 세모를 ㈜새무리컨소시엄에 336억9,000만원에 매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세모의 매각은 현재 법원의 기준으로 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구석이 많다. 새무리컨소시엄은 ㈜새무리와 ㈜문진미디어, ㈜다판다 및 세모우리사주조합으로 구성됐는데 이 중 새무리의 대표는 세모의 대표를 지냈던 황호은씨였고 문진미디어는 유병언 전 회장의 차남 혁기씨, 다판다는 세모의 영업본부장을 지냈던 송국빈씨가 각각 대표를 맡고 있었다. 대표자들의 면면만 봐도 세모나 유 전 회장과 관련된 기업들이다. 유 전 회장이 법정관리를 악용해 채무를 탕감 받은 끝에 세모를 헐값에 되찾아온 것 아니냐는 의혹이 이는 이유다.
실제 한 기업회생전문변호사는 "아무리 장기간 기업이 팔리지 않아 채무 변제가 곤란한 상황이라고 해도 법원이 뻔히 보이는 부도덕성을 눈감아줬을 리는 없다"면서도 "원활한 채무 변제를 위해 다소 미심쩍은 정황에 대해 굳이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측했다.
유 전 회장과 세모는 차명법인 등을 앞세워 회생기업과의 관계를 숨긴 경우 법원이 쉽게 알아차리기 어렵다는 허점을 악용한 것으로 보인다.
세모는 법정관리 기간에 경영합리화 차원에서 ㈜세모해운 소유이던 선박들을 ㈜온바다와 ㈜청해진해운 등의 선사에 나눠 매각했으며 2005년에는 조선사업부를 ㈜천해지에 480억원에 양도했다. 인수 당시 ㈜청해진해운의 경우 개인들이 주요 주주였고 ㈜천해지는 ㈜새천년·빛난별 등 실체를 알기 어려운 법인들이 회사의 주요 주주로 참여해 세모나 유 전 회장과의 특별한 관계점을 찾기 어려웠다. 그러나 세모가 법정관리를 졸업한 2008년 무렵 양사 모두에서 유 전 회장의 일가가 실소유주인 아이원아이홀딩스 등이 대주주로 전면 부상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법정관리를 통해 부실 계열사의 부채를 떨어낸 후 차명법인을 통해 헐값으로 인수하게끔 해 회사를 다시 찾아오는 '법인세탁'은 세모뿐 아니라 다른 기업들에서도 종종 보이는 법정관리 악용 사례다.
'일당 5억원' 황제노역으로 공분을 샀던 허재호 전 대주그룹 회장 역시 이 방식으로 부도 계열사들을 재인수하려 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허 전 회장은 그룹 계열사에 다른 계열사를 지원하게끔 한 후 그 채무를 안고 법정관리에 들어가도록 해 채무를 일정 탕감 받고 제3자를 통해 법인을 다시 인수해 그룹에 편입시키려는 시도를 했다는 의심을 사고 있다. 한 중소기업 관계자 역시 "물품대금 한푼 안 주고 부도난 회사가 법정관리에 들어가 팔렸다는 소식을 듣고 확인해보면 사장의 친인척이나 아는 사람이 인수해간 경우가 허다했다"며 "사실을 확인해 문제 제기를 하니 인수회사까지 몇 개월 뒤 부도처리시키는 경우도 봤다"고 토로했다. 아예 사업을 파산시켜 모든 채무를 면책 받은 경영자가 1년도 채 되지 않아 동일한 주소지에 동일한 인력으로 동일한 사업장을 꾸려 사업에 나서는 경우도 있다. 채권자들 입장에서는 속이 터질 노릇이지만 종결 후 사후관리를 하지 않는 법원 입장에서는 이 같은 불법행위를 알아차리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말이다.
한 회생전문변호사는 "법정관리에 들어갔던 기업을 원래의 주인이 되찾아간 정황만으로는 '고의 부도'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며 "다른 사업으로 재기해 원래 기업을 되찾았다고 볼 수도 있는 상황에서 사후적인 법적 문제 제기는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관리 시점에서 사전에 부도덕한 인수자를 걸러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이런 면에서 "인수자의 자금 출처나 기존 기업과의 관계 여부 등을 좀 더 자세히 따지겠다"는 중앙지법 파산부의 방침은 고의 부도나 악의적인 법정관리를 걸러내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수백억원에 달하는 기업 인수자금이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흘러들어왔느냐를 파악한다면 인수 희망자와 기존 기업 대주주와의 고리를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법원의 강제성 없는 내부방침이 어느 정도 효력을 발휘할지는 미지수다. 파산부의 한 관계자는 "지금도 인수 희망자 측에 미심쩍은 부분이 있는 경우 매각주관사인 회계법인 등에 자금 출처 등을 확인하라고 하고 있지만 상대 쪽에서 '알려줄 이유가 없다'고 하면 강제로 확인할 수는 없다"고 설명했다.
기업에 지나치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기업 회생 절차가 도입된 취지에 맞느냐는 것도 법원이 고민하는 부분 중 하나다. 자칫하다가는 '기업 회생을 통한 채무 변제'라는 가장 중요한 목적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윤준 부장판사는 "회생 절차상의 인수합병(M&A)이라고 해도 결국 이는 도산기업과 인수기업의 개별계약으로 봐야 한다"며 "법원이 공정한 중재자가 돼야 하는 것은 맞지만 개별계약의 어디까지 관여해야 하는지, 그 관여가 기업에 도움이 되는 길인지에 대해서는 좀 더 고민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