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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는 3만 원을 줬는데 그날은 돈이 없어서 만 원만 줬어… 말을 했더라면 더 줬을 텐데….”
2일 안산 고잔 화랑유원지에 마련된 세월호 희생자 합동분향소에 들어선 김모(82세)씨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절대 자신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던, 결코 있어서는 안될 악몽이 현실로 나타나면서 여든을 넘긴 할아버지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손자이자 장손을 잃었다.
김씨는 “여행 가는 줄은 몰랐는데 가기 3일 전에 왔더라구, 그래서 그랬지…”라며 붉게 물든 눈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김씨의 손자는 부천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나왔지만 고등학교는 너무 먼 곳에 배정돼 지난해 7월 단원고로 전학을 왔다. ‘학교가 집과 조금만 가까웠더라도, 전학만 가지 않았더라면…’ 하는 안타까움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그는 “잘못되려니까 그런 일인 생긴 것인지… 가까운 데 배정됐더라면 안산까지 전학도 안 왔고 그렇게 허망하게 떠나지도 않았을 텐데… 이런 이야기는 하나 마나 한 이야기지 뭐…”라며 말끝을 흐렸다.
아들·며느리는 사고 소식을 듣자마자 진도로 달려갔고 김씨도 다음날인 17일 비극의 현장에 내려갔다. 하지만 이 때까지만 해도 손자가 살아있을 것이라는데 추호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손자는 18일 결국 싸늘한 주검이 돼 돌아왔고 희망은 절망으로 변했다.
다른 유가족처럼 김씨도 정부와 대통령에 대한 서운함이 짙게 느껴졌다. 그는 대통령이 진도에 내려왔다는 소식에 ‘뭔가 있겠지’하고 기대를 걸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대통령을 직접 보고 난 후에는 실망과 한숨만 커졌다. “그래도 대통령께서 오신대서 갔더니 말만 조금하고 가더라구….”
손자가 떠나던 날을 손자의 눈, 코, 입, 몸 구석 구석 그리고 추억을 기억하듯 자세하게 기억해냈다.
그는 손자가 떠났던 날의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마지막 가는, 언제까지 함께 하고픈 손자의 하나 하나를 결코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우리 손자 장례식 때는 학생들이 한 2,000명은 왔어. 부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하교 친구들 다 왔지. 안산 학생들도 오고. 이틀 동안 다 왔는데, 나가면 또 들어오고 또 들어오고, 그랬. 부천에서도 선생님이 왔고. 경찰차 두 대 인솔하고 영구차도 대통령 그 공작새 그려진 영구차에다 싣고 그러고 갔어….”
여든의 할아버지가 그렇게 힘없이 돌아서고 얼마 안 있어 하늘에서 서글픈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