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현칼럼] 너무 오래사는 위험 사회

피라미드 건설공사에 동원된 이집트 일꾼들의 평균 수명은 30세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피라미드들 중 가장 규모가 큰 쿠프왕의 것은 건설에 소요된 기간이 20년이 넘었다고 하니까 만약 어느 일꾼이 15세부터 일을 했다면 그 사람은 평생 같은 일만 하다가 일의 끝을 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이집트 시대부터 따져 2천 년도 더 지나 20세기 초 미국인의 평균 수명은 41세였다고 하므로 인간의 수명은 그다지 빠르게 늘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21세기 초 우리나라 남자의 평균 수명은 80세에 가깝고, 여자는 80세가 넘었다. 달리 말해 한 세기만에 인간의 수명은 그 전 2천년 동안 증가한 것보다도 더 많이 늘어났다. 수명이 갑자기 길어지는데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무엇인가. 의학자들은 의학기술의 발달로 천연두와 콜레라와 흑사병 같은 인류를 괴롭혔던 유행병을 거의 퇴치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농업관련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농업기술의 획기적인 발달로 식량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물론 틀림없이 맞는 주장이다. 그러나 그런 거창한 기술 발달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어쩌면 사소하지만 의미 있는 자각 덕분이었다. 예를 들면 사람들은 마을의 공동화장실 때문에 공동 우물이 오염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화장실을 우물보다도 훨씬 더 낮은 곳에 세우도록 한 결정은 사람들이 질병에 감염되는 것을 크게 예방했다. 그리고 가을 들판에 쌓아둔 곡식은 쥐와 곤충들이 먹어치우고, 곡식의 이동 중에 손실이 발생하는 것을 인식하고 시멘트로 된 공동 창고를 만들어 저장하거나 운반도구를 튼튼히 한 것은 식량증산에 있어 농업기술 발달에 버금가는 큰 기여를 했다. ‘정보가 힘이다’라는 말은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정보도 소수 특권층의 전유물이 아니다. 구글의 등장으로 이제 “몰랐다”고 하는 변명이 통하지 않게 됐다. 내세를 준비하면서 참고 살도록 훈련받은 중세 사람들이 21세기 세상을 봤다면 영락없는 유토피아로 여길지도 모른다. 노동자들도 힘든 육체노동으로부터 벗어나 오래 살면서 예술과 문화와 스포츠를 즐기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오래 사는 것은 당연히 축복뿐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때로는 ‘너무 오래 사는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20세기 초만 해도 부모가 보험을 든 것은 주로 자신들이 너무 일찍 사망할 경우를 대비해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 드는 교육보험 또는 사망보험이었다. 지금은 반대로 너무 오래 살면서 자식들에게 얹혀살지 않기 위해 좀더 솔직히 말해 자식들에게 버림을 받아도 생존하는데 지장이 없도록 노후보험을 들고 있다. 한 성직자가 운영하는 우리나라 시골의 어느 사회시설에서 주말 예배가 끝나고 나면 간혹 치매에 걸린 부모를 그대로 두고 가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해서 요즘 그 성직자는 예배 끝에 “오늘 모시고 온 부모님을 잘 모시고 돌아가십시오”라고 의도적으로 강조한다고 들었다. 오래 살면 노욕(老辱)을 먹게 된다. 자식이나 손자가 먼저 세상을 떠나는 보지 않아야 할 슬픔도 맞보게 된다. 게다가 평생 의료비용 중 95%를 말년 5년 동안 지출하게 된다는 통계도 있다. 열심히 일만하다가 은퇴한 사람들 중에는 마치 술담배를 끊은 사람에게 금단현상이 나타나듯이 할 일이 없어서 불안해하는 경우도 있다. 요컨대 오래 사는 것은 위험하다. 필자는 최근에 노후생활과 관련된 책을 읽었다. 그 중에 이런 장면이 있었다. 대기업의 임원으로 재직하다가 은퇴한 두 친구가 있었다. 한 친구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내년에는 어떤 장학재단의 회장직을 맡을 예정인데 직원들도 몇 명 있어.” 다른 친구는 그것이 별로 부럽지 않다는 듯이 대꾸했다. “앞으로 나는 사람을 거느리는 일이면 어떤 일도 하지 않으려고 마음먹었어. 사람들과 다투는 일은 이제 지긋지긋해.” 억지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얼마나 자유스러운지 모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은퇴를 하고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노후를 즐길 수 있는 자유를 얻는다. 그러나 자유를 즐기기 위해서는 미리부터 자기관리가 필요하다.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