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은행이 자리잡은 종로구 관철동 삼일빌딩. 이 건물 사람들은 지난 한해 삶과 죽음을 넘나들었다. 폐쇄가 결정된 자회사 직원들의 농성으로 현관 셔터가 하루가 멀다하고 내려졌고 수십년간 열정을 쏟았던 많은 직원들이 이 건물을 떠나갔다. 잇단 개혁과 파격적인 인사조치가 이어지면서 직원들은 수시로 이삿짐을 싸고 자리를 옮겼고 하위직급 팀장 밑에서 일하는 상위직급 팀원의 모습도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산업은행은 우리나라가 세계 12대 경제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기반을 마련하는 데 일조를 했다. 국가를 대신해 외국 금융기관으로부터 싼 이자로 외자를 조달하고 필요한 기업에 산업자금을 공급하는 국가 경제의 파이프라인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년에 몰아친 외환위기와 IMF한파는 산은의 긍지도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한보·기아 등 국내 굴지의 대기업들이 잇따라 쓰러지고 기업들은 설비투자 의욕을 잃었다. 시설자금 수요도 없고 국가신용등급도 투자적격 이하로 떨어지면서 외자조달도 불가능해지는 등 산은의 위상은 크게 위축되고 말았다.
이 와중에서 산은의 구조조정이 시작된 것은 지난해 4월 이근영 총재가 취임하면서부터. 강요받거나 보이기 위한 구조조정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경영합리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李총재는 부임하자마자 젊고 개혁적인 직원들로 태스크포스팀을 구성, 산은의 발전을 위한 개혁안을 만들도록 했다. 李총재는 산은의 전통과 직원들의 생각, 그리고 자신의 경영철학을 하나로 묶어 경영혁신의 기본틀을 마련했다.
산은의 개혁은 인력과 조직감축, 업무처리절차 개혁, 새로운 인사제도 정착 등에서 나타났다.
◇10년전 인원과 35%의 조직축소, 2개의 자회사= 기업을 상대로 산업자금을 공급하는 산은은 수백개 점포에 만여명의 인력을 운용하는 시중은행보다 자산규모는 크지만 직원과 점포 수는 월등히 적다. 그런데도 97년말 2,525명이던 직원은 3차례에 걸친 인력 구조조정으로 24.5%가 감축된 1,978명으로 줄어들었다. 작년 한해 은행을 떠난 직원이 616명이고 그중 3급 이상 간부직원이 199명으로 전체 퇴직인원의 32.3%에 달했다. 3급이상 직원의 비중이 20.7%인 점을 감안하면 상위직급의 인력감축 폭이 컸다. 2,000명 미만인 현 인원은 10년전인 89년도 수준이다.
조직도 대폭 줄였다. 97년말 「8본부 30개 부서 74개 점포」에서 「6본부 22개 부서 45개 점포」로 35% 가까이 축소됐다. 특히 24개에 달했던 해외점포는 10개만 남기고 모두 폐쇄됐다. 미래의 잠재수요도 중요하지만 현재의 영업여건을 충족시키지 못 하면 과감히 없애버렸다. 이사수는 8명에서 6명으로 두명을 줄인 대신 외부 금융전문가를 사외이사로 영입할 계획이다.
산은은 강도높은 자회사 구조조정으로 개혁의 강한 의지를 보여줬다. 자회사 구조조정은 반발도 많고 고통이 컸다. 산은은 5개 자회사 가운데 산업증권과 산업선물을 폐쇄시켰다. 산업리스와 한국기술금융은 합병시켜 여신전문금융기관을 만들 계획이다. 5개 자회사 중 3개사를 없애고 한국기업평가와 여신전문금융기관 2개만 남겼다.
◇진정한 개혁은 업무처리 시스템의 개혁= 물론 외형 축소만이 개혁의 전부는 아니다. 산은은 은행업무의 근간인 여신업무의 처리절차를 국제적 기준에 맞도록 재설계했다.
미국 보스턴컨설팅사(BCG)와 계약을 체결하고 여신업무프로세스의 개혁을 추진해 선진금융기관 수준의 여신심사체제를 구축했다. 여신마케팅과 심사를 이원화시키는 CO(CREDIT OFFICER·신용관리역)와 RM(RELATIONSHIP MANAGER·고객전담역) 제도를 도입해 여신심사의 투명성과 전문성을 확보했다. 이를 통해 모든 여신은 CO와 RM의 합의를 통해 이뤄지고 부실이 발생했을 경우 양쪽에 똑같은 책임을 부과한다.
총재와 임원의 여신전결권을 없앴다. 협의체를 구성해 집단심사를 하도록 했다. 어느 한 개인에 의해 독단적으로 대출이 결정되는 것을 제도적으로 막았다. 특히 총재는 여신심사 의사결정에서 완전히 배제해 업무부담을 줄이고 대외적인 영업활동에 보다 주력할 수 있도록 했다.
팀제를 도입해 결제절차를 대폭 줄였다. 기존의 부장_부부장_차장_대리_행원의 5단계가 팀장_팀원의 두 단계로 줄어들었다.
◇발탁인사·연봉제·전문가 기용= 조직의 신진대사를 활력있게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인사관리제도의 변화. 산은의 인사는 말그대로 상전벽해다. 연공서열, 온정주의의 인사관행이 타파되고 철저한 능력위주의 인사관리를 시작했다.
올해부터 3급 이상 직원들은 인사고과에 의한 연봉을 받는다. 4급 이하 직원들에게는 기본급에 성과급이 주어지고 국제투자본부는 행원을 포함한 전원이 업무성과에 의한 연봉을 받는다.
「발탁인사제도」도 도입됐다. 유능한 직원들은 연공서열과 관계없이 발탁에 의해 진급했다. 직급과 직위를 분리해 상위직급 팀원이 하위직급 팀장밑에 배치되기도 했다. 영업점장 공모제를 통해 대전·부천·포항·잠실지점장을 선발했다. 특히 서울의 강남요지인 잠실 지점은 산은 역사상 첫 여성 지점장이자 첫 4급 지점장이 임명되기도 했다.
국제투자본부 및 신용관리역(CO)은 직원들의 지원서를 받아 선발했다. 개별직원의 배치에 있어서도 연공서열·직급순이 아니라 철저히 능력에 의한 인사배치를 했다. 고참급 부장들이 본점 주요기획부서에 포진하는 과거의 모습을 탈피했다.
외부 인사 채용도 처음으로 이뤄졌다. 지난해 IR(INVESTOR RELATIONS·투자자 관리)과 국제투자은행업무 활성화를 위해 외국인 전문가를 이사대우급으로 채용했다. 앞으로도 전문분야의 외부 전문인력을 중용할 계획이다.
산은은 이외에도 이사실을 일선부서로 전진배치해 현장경영을 강화했으며 이사 전용차량도 없애 경영진의 솔선수범을 통한 위로부터의 개혁을 실천하고 있다. 거듭 태어난 산업은행이 과연 어디까지 바뀌는 모습을 보일지 귀추가 주목된다. 【우승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