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아름다운 시절' 감독 이광모씨

밤길을 걷는 사람이 있다. 손전등 하나를 들고 칠흑처럼 어두운 공간에서 길을 만들어가는 사람. 어두컴컴한 어느 구석에서 꽃 한송이라도 발견한다면 불역열호가 아니던가. 그는 창작행위를 통해 삶을 배우고, 세상을 이해하게 된다고 말한다. 창작을 하지 않았다면 도저히 알 수 없는 사물의 이치를 깨닫게 된다는 그의 고백은 그러니까 격물치지의 이치를 따르고 있는 셈이다.영화감독 이광모씨(37)는 「아름다운 시절」이라는 영화 한편으로 우리 영화사에 작지만 귀한 신화 한편을 연출한 사람이다. 그가 의도적으로 대중을 멀리하려 한 것은 아니지만, 영화 「아름다운 시절」은 관객들에게 지리하다는 평가를 받을 것이라는 선입견에 시달려왔다. 만약 관객이 들지 않았으면 『창작을 통해 세상의 이치를 배워나간다』는 이 감독의 말은 하나의 독백이자 고집으로 머물렀을 것이다. 지난달 말 전국에서 동시에 개봉된 「아름다운 시절」은 이제까지 17만명의 관객을 모은 것으로 집계됐다. 서울서만 12만을 동원했으니 흥행면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둔 셈이다. 지방 기록이 좋지않은 것은 극장주들이 흥행에 자신이 없어서 상영기간을 대개 1주일 정도만 잡아두었기 때문이었다. 서울서는 내년까지 상영이 이어질 예정이다. 한국전쟁이라는 비극적 공간에서 이름없는 사람들이 겪었던 애환들. 이 감독은 연을 날리듯이 아름다운 풍광과 음향 속으로 그런 것들을 실려보냈다. 『「아름다운 시절」에는 사물을 멀리서 오래 잡는 롱샷과 롱테이크가 반복됩니다. 좀 지나치다는 말도 들었지요. 그러나 나는 이 영화를 통해 과거의 삶을 응시하려했지, 드라마나 심리적인 요소를 동원해 작위적인 재미를 연출하려했던 것은 아닙니다. 말하자면 그 무엇을 설명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고, 찾아가려 했던 것이지요』 이 감독의 이같은 고백은 그가 왜 영화라는 매체를 선택했는지에 대한 응답도 된다. 고려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미국 UCLA 대학원에서 영화연출을 전공했던 그는 원래 시를 창작의 업으로 삼으려 했다. 『시는 개념이나 느낌을 의미화해서 전달하지만 구체적인 경험을 전달하는데는 약합니다. 영화는 시에 비해 훨씬 실재적이고 역동적인 매체입니다. 상상력을 형상화하는데도 영화는 많은 장점을 갖추고 있지요. 학창시절 텔레비전 주말의 명화에서 진 헤크만과 알 파치노 주연의 「허수아비」를 보고 영상미학이 가질수 있는 괴력을 확인하게 됐지요』 아이러닉한 일이지만 이 감독을 영화로 이끈 매체는 할리우드 영화였지만, 그는 「클리프 행어」를 끝으로 할리우드 영화를 본지 4년이나 지났다. 『너무 작위적입니다. 그들(할리우드)은 어떤 공식화된 룰을 갖고 있지요. 재미가 없으면 안된다는 강박관념. 무협지처럼 정형화된 시나리오로 사람들을 습관적으로 끌어들입니다. 저는 그런 것들에 회의를 느낍니다. 재미는 천변만화하는 우주의 이치와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문학에서 따져보자면 도스토예프스키를 읽는 재미와 톨스토이를 찾는 재미는 제각각이지만 모두 의미있는 것 아닙니까. 보는 사람에 따라 재미는 얼마든지 재창조되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할리우드 영화는 우리에게 정형화된 틀의 재미를 강요하지요』 「아름다운 시절」은 상도 많이 받았다. 지난 95년 제7회 하틀리-메릴 국제 시나리오 콘테스트에서 그랑프리를 받았다. 그리고 지난 11월에는 무려 4곳의 영화제에서 큰 상을 잇따라 받았다. 11월 8일 제11회 동경 영화제에서 금상을, 이어 19일에는 제18회 하와이 국제영화제 그랑프리를, 22일에는 제39회 그리스 데살로니키 영화제에서 최우수 예술공헌상을, 그리고 29일에는 제18회 프랑스 벨포르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한 것. 『다음 작품은 이산가족 문제를 다룰 예정입니다. 한달간 푹 쉬고 시나리오 작업에 들어갈 예정이지요』 약간은 상기된 표정의 이 감독의 얼굴에 옹골진 자신감이 담겨 있음을 눈치챌수 있었다. 【이용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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