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누가 책을 한권 갖다주며 읽어보란다.『후흑열전(厚黑列傳)』이라… 이름이 신기해 얼른 펴보니 얼굴이 두껍고 뱃속이 시커먼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후흑열전의 저자 이종오(李宗吾)가 고금의 영웅호걸들을 종합 연구한 결과 모두들 후안무치(厚顔無恥)하고 복장이 검다는데 공통점이 있음을 발견했다.
그래야 이것저것 눈치 안 살피고 큰일을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무슨 일이든 크게 성공하기 위해선 아녀자의 인(仁)과 소인배의 혈기를 가장 경계해야 한다고 설파했다. 당장의 분함을 참지 못하고 분연히 일어서면 의사(義士)나 열사(烈士)는 될 수 있을지언정 큰일은 도모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후흑(厚黑)의 인물이라 해 모두가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잘못하면 파렴치범이나 건달이 되기 쉽다. 낯가죽이 두껍고 뱃속이 검되 결코 겉으로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 조물주는 사람의 마음을 밖에서 들여다 볼수 없도록 만들어 놓았기에 피나는 단련과 수양을 쌓으면 얼마든지 인의(仁義)의 인물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과연 오묘한 이치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말이어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君主論)을 찾아보았다.
「군주된 자 모름지기 위대한 일을 하고져 할 땐 사람을 속이는 재주, 즉 권모술수를 습득할 필요가 있다. 오랜 역사적 경험으로 보아 공명정대한 군주보다 인의(仁義)같은 것을 전혀 개의치 않는 군주가 훨씬 위대한 일을 했다」고 돼 있다.
마키아벨리는 400년전 이탈리아 사람이고 이종오는 금세기 초에 활약한 중국 사람이지만 역시 고수(高手)끼리는 서로 통하는가 보다. 둘다 난세에 산 사람들답게 난세의 지혜와 인간과 권력의 본질을 정확히 집어냈다는 점에선 후세 사람들의 칭송을 받을 만하다.
만약 두사람이 요즘 한국에 태어났다면 그런 책을 쓰기 어려웠을 것이다.
너무나 평범한 상식이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에선 영웅호걸이 아니더라도 후흑열전에 나오는 정도의 후안무치는 보통 수준이며 웬만한 사람이면 이미 후흑(厚黑)의 묘리를 터득해 실천하고 있으니 무엇이 신기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