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연구개발(R&D) 관계자들은 연구개발과정을 평가할 때 `죽음의 계곡`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기초 및 응용기술을 개발해도 정작 상업화를 앞두고는 사장(死藏)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애써 개발된 기술이 후속 투자가 이뤄지지 않아 사장되는 것을 `죽음의 계곡`으로 부르는 것이다.
하지만 정부 R&D 프로젝트 성과 가운데 과연 어느 정도가 `죽음의 계곡`에 이르는지 조차 정확히 파악되지 않고 있다. 관련통계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국가과학기술위원회를 지원하는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은 최근에야 정부R&D사업성과에 대한 데이터베이스(DB) 구축작업을 시작했다. 익명을 요구한 과학기술정책 관계자는 “연구개발의 속성상 개발이 끝나도 2,3년이 지나야 시장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데도 원인이 있지만 정부가 R&D사업에 대한 사후관리를 게을리 하는 탓에 연구개발성과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 R&D 관련 부처, 생색나는 일만 한다=정부 R&D예산을 거의 독점하는 산업자원부, 과학기술부, 정부통신부 등은 차세대 성장동력산업 주도권을 놓고 지루한 신경전을 되풀이 했다. 이들의 다툼이 좀처럼 끝나지 않자 결국 조정권은 재정경제부에 넘어갔다. 산자부 등 3개부처가 국가R&D사업을 놓고 항상 갈등을 빚는 것은 일단 특정사업에 대한 주도권을 확보할 경우 관련예산도 늘어나고, 여기에 비례해 힘도 커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후관리는 다르다. 사후관리에 치중할 경우 오히려 망신을 당할 가능성도 높다. 모든 일이 그렇듯 연구개발도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부처들로서는 실패했다는 것을 스스로 밝히 필요가 없다. 그래서 실패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기회도 당연히 사라진다. 국책연구기관의 한 관계자는 “정부가 사후 관리를 거의 외면하다 보니 일선 연구현장에서는 기존 연구성과를 얼기설기 묶어 새로운 연구 성과인양 제출하는 경우도 많다”면서 “정부나 일선 연구현장, 모두 모럴 해저드(moral hazard)에 빠져 있는 셈”이라고 비난했다.
◇시장성있는 연구성과도 사장되는 경우 숱해=정부가 지원한 R&D사업 가운데 시장성이 있는 것으로 평가돼도 또 다른 걸림돌에 부딪치게 된다. 새 기술을 인정받아 특허를 취득해도 상품화하는데는 상당한 돈과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특허청에 따르면 등록된 특허가 제품화되는 비율은 26.6%다. 나머지는 그저 기술개발로 만족할 뿐이다. 가장 큰 이유는 제품화에 드는 비용을 제대로 조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 제품 및 공정개발 R&D투자에 드는 비용은 원천기술의 연구개발단계에 비해 약 4.4배, 상용화단계에서는 제품 및 공정개발R&D투자에 비해 약 2.5배 가량 들어간다.
◇미국 등 선진국 수준으로 상업화기술 지원비중 높여야=산업자원부 등은 현재 전체 R&D 예산 가운데 상업화 기술에 대한 지원 비중을 높여야 한다는 입장이다. 산자부 관계자는 “전체 국가R&D예산 가운데 상업화에 지원되는 자금의 비중을 중장기적으로 1%에서 미국 수준(3%)로 높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정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국가과학기술위원회는 각 부처가 집행한 R&D사업을 A, B, C 등 3등급으로 나눠 평가한다. A는 예산지원 확대, B는 예산지원규모동결, C의 경우 예산이 축소되거나 아예 중단된다. 각 부처는 보다 많은 R&D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절대적인 배정규모가 큰 사업에 대해서는 보다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해 애를 쓴다. 따라서 절대적인 배정규모가 작은 분야는 그리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것이 효율적인 예산 확보 전략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상업화 기술에 대한 예산 지원은 뒷전으로 밀려날 수 밖에 없다. 절대적인 금액 자체가 작기 때문이다. 지난해의 경우 산자부, 과기부 등의 기술이전 및 사업화 예산은 500억원에도 못 미쳤다. 결국 상업화 지원 비중을 일정 수준으로 의무화하지 않는 한 국가 R&D 사업의 효율성은 제자리 걸음을 할 수 밖에 없다.
<정문재기자 timothy@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