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즈넉한 중세풍 운치와 열정적인 축제의 낭만을 모두 갖춘 루체른은 예로부터 귀족들이 선호하는 명품 휴양지였다. 햇살에 반짝이는 로이스 강가에 서있는 건물 너머로는 만년설을 모자처럼 쓰고 있는 알프스의 산들을 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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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상 흰 눈이 쌓여있는 필라투스 산. 해발 2,000m 이상의 고지로 관광객을 실어 나르는 산악열차와 케이블카는 꼭 즐겨야 하는 명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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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위스 용병의 용맹과 희생을 기리는 '빈사의 사자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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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에서 가장 오래 된 목조다리인 '카펠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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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초에 방문하면 파스나흐트 축제로 들뜬 시민들도 만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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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최고의 인기 관광지인 루체른(Luzern)은 해발 2,132m 필라투스(Pilatus) 산을 뒤로 두고 낭만적인 루체른 호수 '비어발트슈테르'의 서안 로이스 강을 앞에 놓은,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배산임수의 도시다. 특히 남쪽 구시가 지역은 중세 분위기를 한껏 풍기는 상점들이 줄지어 있다.
◇알프스 만년설 봉우리, 필라투스=중세시대부터 귀족들의 휴양지였다는 루체른에는 '천국과 지상의 중간계'라 불리는 아름다운 만년설의 필라투스 산이 있다. 루체른에서 오를 수 있는 알프스 봉우리는 '여왕봉'이란 애칭의 리기, 융프라우와 같은 경치를 내려다 보는 티글리스, 그리고 필라투스가 대표적이다.
필라투스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명령한 폰티우스 필라투스(본디오 빌라도) 총독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티베리우스 황제의 명으로 죽은 필라투스의 시신이 버려진 로마의 강이 해마다 범람하자 유해를 수습해 다시 묻은 곳이 필라투스 산 정상의 호수다. 그러자 필라투스 산은 수시로 천둥번개가 치는 공포의 산으로 바뀌었다. 스위스 사람들은 빌라도의 악령 탓이라 믿었고 16세기에 루체른 성직자들이 방문한 뒤 호수는 메워졌다. 용에 대한 목격담도 전해진다. 1400년대부터 용을 봤다는 사람이 자주 나타나자 1509년 시(市)는 공식적으로 용의 존재를 인정하기도 했다.
루체른 방문객이라면 결코 잊을 수 없는 필라투스는 세계에서 가장 가파른 경사 48도의 산악열차가 자랑거리다. 톱니바퀴를 이용해 달리는 것이라 덜컹거리는 스릴이 넘친다. 단 한겨울에는 빙판 운행의 위험 때문에 열차는 중단된다. 대신 경쾌한 빨간색이 새하얀 눈, 상록수 녹색 잎과 멋지게 어울리는 4인승 케이블카가 사람들을 실어 나른다. 어떤 이는 나무를 기어오르는 빨간 무당벌레 같다고도 이야기 한다. 케이블카 유리창 너머로 루체른 시내를 한눈에 볼 수 있고 산등성이 눈밭도 실컷 음미할 수 있다. 산 중턱에서 내려 40인용 대형 케이블카로 갈아타 정상까지 이동한다. 꼭대기에는 산장 호텔과 식당 등 편의시설이 마련돼 있다. 지금은 오는 5월 완공을 목표로 360도 전망을 모두 볼 수 있는 '파노라마 전망대' 공사가 한창이다. 2,132m의 정상은 기온이 낮기 때문에 두꺼운 옷과 눈부심을 막는 선글라스가 필수품이다. 급경사를 이용한 초고속 눈썰매, 산악자전거, 패러글라이딩 등의 스포츠를 즐긴다면 더 강렬한 추억을 남길 수 있다.
산에서 내려다 보이는 뷔르겐슈토크 지역은 소피아 로렌의 별장, 오드리 헵번이 두 번째 결혼식을 올린 작은 예배당을 품는다. 고요하게 펼쳐진 설경에 취하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른다. 오후 4시30분이 케이블카 마지막 운행이니 놓치지 말자.
◇유럽 최고(最古)의 목조다리 카펠교=루체른과 서울은 공통점을 갖는다. 도시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을 화재로 잃어버린 경험. 바로 카펠교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다리로 로이스 강의 남북을 연결하며 1333년에 완공됐다. 강 건너 성베드로 성당에 미사를 드리러 사람들이 오가던 다리다. 비가 와도 통행에 문제가 없도록 지붕도 얹었다. 중세풍의 이 다리는 600여년 긴 세월 위용을 자랑했건만 1993년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로 285m 중 절반을 잃었다. 조선조 1398년에 완공돼 지난 2008년 화재를 겪은 우리 숭례문을 떠올리게 한다. 화재 직후 스위스 정부는 400만 스위스프랑을 투입해 1년 만에 끊긴 다리를 다시 이었다. 복원과정의 남다른 점은 화재의 상처를 그대로 남겼다는 점이다. 지금도 카펠교 위로 사람들이 오간다. 걸으며 검게 그을린 흔적, 손상된 부분까지 눈으로 보며 상처를 일깨우곤 한다. 화재도 역사가 됐다.
다리 지붕의 들보 부분에는 루체른의 역사를 기록한 116점의 그림이 있었으나 이중 85점이 불에 탔다. 불 탄 흔적이 역력한 그림까지 65점은 지금도 걸려있다. 시의 행사에 따라 그림은 수시로 교체된다. 카펠교는 4월 이후 더욱 아름답다고 한다. 다리 측면과 난간 부분을 색색의 꽃으로 장식하기 때문에 더욱 낭만적이다.
◇축제의 도시=정숙한 여인 같은 중세풍 도시 루체른이지만 일년에 두 차례 온 동네가 광란의 도가니가 된다. 축제다. 매년 3월 초 사순절(四旬節) 직전에 6일간 사육제(謝肉祭)에 해당하는 카니발 축제가 열린다. 예수의 고난을 따르는 사순절 기간의 기도와 금식을 앞두고 마음껏 마시고 즐기라는 배려인 동시에 고난과 죽음 이후에 부활의 기쁨이 올 것을 미리 축하하는 자리다. 축제기간에는 지역 주민은 물론 외지인까지 몰려들어 흥겨움을 만끽한다. 특히 마지막 날은 축제의 밤이라는 뜻의 '파스나흐트(Fasnacht)'라 불리며 수백명의 광대와 악단이 총출동해 시가지를 누비며 분위기를 한껏 띄운다. 사람들은 일찌감치 일과를 마무리하고 각자의 개성을 화장과 의상으로 표현해 거리로 나와 자리를 잡는다. 7시부터 차량운행이 통제돼 10시까지 행렬이 이어진다. 축제의 피날레는 흥청망청 즐기던 광대를 죽이고 가면을 불태우는 퍼포먼스로 세속적인 인간을 버리고 경건함을 되찾는다는 것을 표현한다. 파스나흐트는 루체른과 바젤이 양대산맥으로 꼽힌다.
루체른을 대표하는 또 하나의 축제는 1938년 시작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국제 음악축제인 '루체른 페스티벌'이다. 토스카니니가 바그너의 지그프리드를 초연한 음악제가 바로 이 행사다. 매년 여름에 4주 동안 열린다. 베를린 필하모니, 빈 필하모니 등 세계 최정상급 오케스트라와 지휘자들이 초청되고 100여개의 연주회가 열린다. 해마다 테마가 바뀌어 음악이 기획되고 밤에는 화려한 불꽃놀이가 축제에 아름다움을 더한다.
◇용맹을 상징하는 빈사의 사자상=스위스는 땅이 좁은데다 척박했다. 그래서 먹고 살기 위해 몸을 팔아야 했고 용병 수출이 주수입원이었다. 스위스 용병은 프랑스로도 파견됐고 1792년 프랑스 시민혁명 당시 루이 16세 왕가를 지키던 786명의 용병이 장렬히 전사했다. 이 안타까운 젊은이들의 죽음 이후 스위스는 용병 수출을 중단하게 된다.
훗날 루이 16세를 위해 죽어간 이들의 용맹성과 충성심을 기리기 위해 세운 상이 루체른의 명물 '빈사(瀕死)의 사자상'이다. 사암 절벽을 파 동굴을 만들고 그 안에 사자상을 조각했다. 창에 찔린 채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사자는 슬픈 눈, 마른 몸을 하고 있지만 떡 벌어진 어깨만은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고 있다. 덴마크 출신 토르발센이 조각을 시작해 1821년 독일 출신 카스아호른이 완성했다. 마크 트웨인은 이 사자상을 보고 "지구에서 가장 슬프고 감동적인 조각상"이라고 말했다. 조형미가 탁월한데 유난히 긴 꼬리가 숙연함을 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