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업원 50여명이 일하는 중소 전기부품회사인 B사는 추석을 며칠 앞두고 공장문을 닫고 말았다. 이 회사는 국제통화기금(IMF)한파로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임금체불 없이 그런대로 꾸려나가 비교적 탄탄한 중소기업이라는 평을 들었다. 그런 B사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제품 주공급처인 중견그룹 소속 J사로부터 9월초 받기로 한 3개월치 납품대금을 주지 못하겠다는 통보를 받은 것이다.
B사 종업원들이 추석을 앞두고 길바닥에 내몰린게 된 것은 엉뚱하게도 J사의 주거래은행이 지난 6월 퇴출당한데서 비롯됐다. J사가 경기은행의 지급보증으로 발행한 200억원짜리 회사채에 대해 외한은행이 조기에 상환할 것을 요구했고, J사는 급한 김에 사채까지 빌려써야 하는 처지여서 납품대금을 결제할리 만무했던 것이다.
『지난달 주거래은행인 외환은행으로부터 내용증명이 날아왔습니다. 경기은행이 지급보증을 서 발행한 회사채를 10월까지 조기상환하라고 했습니다. 만기일이 내년 3월인데 이럴수가 있느냐고 항의했지만 기한까지 갚지 않을 경우 자금회수를 하겠다는데 어쩔도리가 없었습니다.』
B기업의 운명에 결정적 악역을 맡았던 J사 자금담당임원의 변명아닌 변명이다. 그는 『새로운 보증처와 자금줄을 찾기 위해 금융기관에 호소하고 다녔지만 요새 누가 돈을 꿔주겠냐는 핀잔만 들었다』며 『10월까지 회사채를 해결할 수 있을지 막막하다』고 말했다.
퇴출은행 회사채문제는 금융권의 제몫챙기기가 멀쩡한 기업까지 하루 아침에 부도위기로 몰고 가는 사례중 하나에 불과하다.
물론 금융기관도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국제결제은행(BIS)이 요구하는 자기자본비율을 맞춰야 하고, 고객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여신회수가 불가피한 조치라는 입장이다. 퇴출은행 회사채는 충청은행 지급보증분 6,400억원등 총 2조2,400억원. 현재 금융기관들은 지난달부터 퇴출은행 회사채에 대해 일제히 여신회수에 들어가 수많은 기업을 연쇄부도위기로 내몰고 있다.
기업은 금융기관의 최대 고객중 하나다. 기업을 죽이고선 금융도 살 수 없다. 그러나 최근 상황은 「나만 살겠다」는 식의 이기주의가 위험수위를 넘고 있다. 지난 6월 퇴출은행 임직원들의 퇴직금정산은 도덕적 해이라는 비판마저 제기되기도 했다.
삼성경제연구소 정문건(丁文建)상무는 『금융기관은 기업과 공존할 때 존재의미가 있는데도 지금은 윈-윈게임을 벌이는 것이 어느 한 쪽만 사는 제로섬게임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다』며 『그 결과는 실물경제의 붕괴속도가 갈수록 빨라지는 현실에서 보듯 더 깊은 수렁으로 빠뜨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금융은 산업의 혈맥이나 다름없다. 혈액이 제대로 돌지 않을 경우 세포는 죽고 만다. 그래서 정부는 한국은행을 통해 자금공급을 늘리고, 은행들로 하여금 대출에 적극 나서도록 종용하고 있지만 돈은 금융권에서 맴돌고 있다. 재정경제부는 지난 8월 중순 중소기업 특별자금 6조원을 9월까지 앞당겨 지원키로 했고, 한국은행도 9월초 총액대출한도를 2조원 늘리고 금리도 현행 5%에서 3%로 낮췄지만 기업의 자금난은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되레 나빠지고 있다는게 산업현장의 목소리다. 기업대출에 사용해야 할 여유돈이 통화안정증권이나 환매조건부채권(RP) 등에 굴리는데 여념없기 때문이다.
익명을 요구한 시중은행 임원은 『본점에서 지점으로 수시로 대출독려 공문을 내리고 있지만 일선창구에서는 먹혀들지 않는다』며 『은행마다 40%씩 감원이 예고된 상황에서 누가 자신의 자리를 걸고 기업대출을 하겠느냐』고 되물었다.
기업들의 돈구하느라 혈안이 돼 있는 것과는 달리 금융권의 돈놀이는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는 분위기다. 수신금리는 크게 내렸지만 대출금리는 요지부동이다. 1년만기 정기예금 수신금리와 대출금리차(예대마진)는 5~6%포인트까지 벌어졌고, 기업당좌 대출금리도 시장금리를 웃돌고 있다.
신재희(申載熹) 현대상선 이사는 『수신금리 인하에도 불구하고 은행들이 대출금리를 내리지 않는 것은 자기자본비율 제고를 핑계로 자신만 살려는 이기적인 행태다』며 『금융이 제 몫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누굴 위한 금융인지 묻고 싶다』고 불만을 표시했다.
적신호가 켜진 수출에도 금융은 도움은 커녕 산업경쟁력의 발목을 잡고 있다. 시중은행들은 한국은행으로부터 연 12~15%대의 수출지원자금을 받아 20%에 근접하는 금리로 이자놀이를 하기도 했다. 무역어음은 일본보다 6~8%포인트 높을뿐만 아니라 시중실세 금리보다 높아 기업으로부터 외면받고 있는 실정이다.
금융의 경쟁력은 모든 산업경쟁력의 근원이 되고 결국에는 국가경쟁력의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전경련을 축으로 한 재계가 슈퍼뱅크를 설립하겠다고 나선 것도 더 이상 산업이 금융에 지배당하는 것을 막아보자는 마지막 몸부림이다.
한국경제연구원 김세진(金世振)금융조세실장은 『금융산업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국내금융기관의 외자유치 및 해외매각이 필수적이다』면서 『그럴 경우 선진금융기법도 국내에 전파되고, 경영혁신도 도모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공병호(孔柄淏)자유기업센터소장도 『최근의 금융위기는 은행들이 주인없는 상태에서 정부와 종업원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였기 때문』이라면서 『자산운용·상품개발·인사권 등에 대한 규제는 과감히 풀어 실질적 민영은행으로 탈바꿈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국경없는 무한경쟁시대에 우리 기업들이 경쟁력을 회복하고 더 나아가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를 이른 시일안에 벗어나기 위해서는 금융이 더 이상 경영활동의 발목을 붙잡아서는 안된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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