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이후 우리나라의 빈부격차가 확대됐다고 한다. 지난 2년간 수많은 중소기업이 도산하고 100만명이 넘는 근로자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이에 따라 중산층과 서민층이 큰 고통을 겪고 있다. 반면 부유층의 소득과 재산은 최근의 공직자 재산변동 보도에서 알 수 있듯이 불어났다.빈부격차가 커지면 사회가 불안해지고 구조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기가 어려워진다. 이를 인식해 정부는 최근에 중산층 및 서민생활안정대책을 내놓았다. 예상보다 빠른 경기회복으로 늘어나는 재정수입 중 절반은 재정적자 축소에, 나머지 절반은 중산층과 서민층의 생활안정에 쓴다는 것이다.
지난해와 올해 재정적자가 너무 커져 중장기 재정전망이 나쁘다. 다른 한편 사회안전망이 워낙 미흡하기 때문에 사회복지대책을 계속 확충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이 두 가지를 같이 돌보는 방향으로 재정수입의 초과액을 절반씩 쓴다는 것은 좋은 묘수이다.
노동시장의 유연성과 고용조정은 우리 경제의 구조개혁에 불가피하다. 개혁과 고통분담은 기득권, 특히 잘못된 기득권을 깨는 것이다. 고용조정은 지금까지 자기 의사에 반해 해고되지 않아온 근로자의 기득권, 즉 시장경제에는 안 맞지만 근로자에게는 가장 중요한 기득권이 깨진 것이다. 근로자가 삶을 일구는 일터에서 쫓겨나면서 구조조정의 혹한을 맨몸으로 때웠다면 더불어 사는 사회를 위해 「가진자」의 기득권도 비례적으로 깨는 장치가 있어야 한다.
정부는 4대 부문 구조개혁을 내세워 가진자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과감하게 기득권을 깨는 작업을 전개해왔다. 그러나 못 가진 자가 보기에 이 작업은 너무 미흡하다. 노동계가 구조조정의 철회를 종종 요구하는 것은 가진자의 기득권은 자기네처럼 빼앗기지도 않고 가진자가 스스로 포기하지도 않는 데서 오는 허탈감과 분노의 표현이다.
정부가 많은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민심이반이 때 이르게 나타난 것은 집권세력이 잘못된 기득권에 집착한 데 주로 기인한다. 정권을 전리품으로 생각해 인사를 자기 맘대로 하고 권력의 시녀인 검찰을 앞세워 편파사정을 하며 정권재창출을 노골적으로 기도하는 것 등이 과거정권의 기득권 남용행태였다.
이 잘못된 기득권이 타파되고 「준비된 대통령」이 사심없이 대국적인 화합정치를 펼치기를 국민은 바랐다. 이런 국민의 여망에 전혀 부응하지 못한 것이 오늘날 정치혼미의 근본원인이다. 물론 정부출범 초부터 막가는 행태를 보인 한나라당의 잘못이 크다. 그러나 척박하고 답답한 정치풍토가 오래 지속되는 것은 칼자루를 쥐고 있는 정부와 여당에 더 큰 책임이 있다.
노동계가 소중한 기득권을 포기한 것에 걸맞게 집권층도 잘못된 기득권을 포기해야 한다. 버리는 것이 크게 얻는 길이다. 기득권을 버릴 때 벌써부터 과거 정권 못지않게 경제를 정치논리로 접근하고 한건주의에 매달리는 폐단도 크게 시정될 것이다.
변화의 와중에 있는 재계가 아직 기득권으로 생각하는 수출금융도 이제 다시 점검해볼 때가 됐다. 우리나라의 수출금융은 세계에서 가장 체계적인 제도를 갖추어 개도국의 전범(典範)이 되고 있다. 그러나 설비수출계약서만 있으면 2억∼3억달러가 자동 대출되는 연불수출금융제도는 보완돼야 한다. 수출거래를 성사시키기만 하면 은행 돈을 마음대로 끌어 쓸 수 있기 때문에 재벌들이 얄궂은 나라들을 들쑤시고 다닌다. 국제사회에서 부패라운드가 논의되는 것도 해외에서 벌이는 우리 재벌의 행태와 연관이 있다. 대우그룹의 세계경영이 파탄을 맞은 것도 수출이라면 아무런 제동도 걸지 않는 나라 전체의 분위기에 궁극적인 원인이 있다. 연불수출금융은 극소수 고위험국에서 우리 재벌끼리 과당 경쟁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는바 은행들이 위험도를 감안해 자율적으로 국가별 대출한도를 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정부가 연불수출 재원을 대폭 늘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참개혁이란 잘못된 기득권 구조를 뜯어고치는 것이다. 서민층 생활안정대책과 생산적 복지사회의 비전도 중요하다. 하지만 정부와 재계가 「내 탓이오」 정신에 입각해 기득권을 깨고 대승적인 자체 개혁을 이루어내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