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나영 기자의 1일1식(識)] <129> 부장님, 그건 신중한 게 아니라 모르시는 거잖아요


‘그거 근거가 있는 거야?’ 우리나라 기업이나 공공 조직에서 새로운 사업을 주제로 누군가에게 발표를 시켰을 때 흔히 나오는 질문입니다. 현상을 해석하는 관점이나 아이디어의 창의성을 묻기 전에 문제 제기 자체의 타당성을 검증하는 것입니다. 상사들은 ‘데이터를 가져와 봐라’, ‘정확한 자료를 인용하라’며 발표하는 사람을 압박합니다. 준비가 잘 된 사람은 잘 대답하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된통 깨지기 일쑤죠. 그러나 능력이 있는 사원이라면 상사의 질문을 대여섯 개쯤 미리 준비해 두고 그에 대응하기 위한 다양한 답변을 준비해 놓곤 합니다. 어차피 회의장에서 있었던 일은 업무 그 자체가 아니라 새로운 일을 조직 안에서 인정받기 위한 수단이라는 점을 잘 간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여러 사람의 편견과 권위 의식으로 뭉쳐진 ‘질문의 장벽’을 통과하고 나면 가장 높은 의사결정자의 결재를 거쳐 특정 사업이나 일을 시작할 수 있는 토대가 만들어 집니다. 물론 성과가 좋지 않다면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하겠지만요.

이런 현상은 전 세계 어느 문화권에서나 공통적으로 벌어지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외국 사례 또는 논리가 빈약하면 외국 경영 전문가가 이야기한 개념 등을 기반으로 논리를 ‘백업’해 보라는 주문을 하기도 합니다. 현업 종사자들은 누군가 자신감이 없을 때 다른 사람의 주장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업계 경력이 오래되고 학력이 높을수록 아이디어 자체의 신선함과 타당성보다는 권위 있는 누군가가 인증해 준 것이냐에 집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때로는 자기 생각대로 문서를 만들어 오게 하고서도 자신이 없음을 감추기 위해 이런저런 자료상의 근거를 보완해 오라고 시키기도 합니다. 그러는 사이에 핵심 의사결정은 늦어지고, 조직은 다른 곳보다 한 템포 느리게 일을 하는 셈이 되고 맙니다.

한때 우리 기업이나 조직들은 중국을 무시했습니다. 가장 비합리적이고 깔끔하지 못한 일처리 방식을 ‘짱깨식’이라며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알리바바의 마윈이나 텐센트의 마화텅을 ‘경영구루’로 모시려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심지어 그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온갖 뉴스로 재생산되기 바쁩니다. 얼마 전까지 30살짜리 주커버그와 웬만한 한국 기업인보다 젊은 셰릴 샌드버그가 주목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이들 비범한 경영자들이 전면에 나설 수 있는 토대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허례허식’이 없는 실용주의적 조직 기풍 때문이라고 입을 모읍니다. 우리나라에만 있는 레드 테이프(Red Tape), 즉 새로운 사업이나 전략에 자신이 없기에 근거를 일일이 달아 오라는 ‘귀찮은 일’을 안 해도 되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최경환 경제부총리와 함께 젊은이와 경제 대담을 했던 알리바바의 마윈이 통계자료나 경영학자의 문구를 인용하는 것을 보셨습니까? 그는 그냥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도자 자체가 콘텐츠로 꽉 차 있기 때문에, 일일이 부하에게 ‘내용을 만들어 와라’고 지시하지 않아도 되는 겁니다. 항상 글로벌 스탠더드를 지향하지만 그런 면에서 많은 조직이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누군가의 의견을 허점만 찾으려고 한다는 건 빠르고 똑똑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토대 자체가 없다는 반증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부하직원의 아이디어를 아이디어로 보지 않고 신랄하게 비판만 하고 있을 몇몇 부장님께 한 마디 하겠습니다. “부장님, 그건 신중한 게 아니라 모르시는 거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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