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첼로를 가르쳐 주신 선생님들과 어머니에게서 배운 것은 악기를 잘 다루는 방법이 아니라 음악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즐기는 마음이었어요. 예순이 넘은 지금까지 한 번도 질리지 않고 첼로를 연주해 온 것도 그 덕분인 것 같아요."
세계적인 첼리스트인 정명화(69ㆍ사진) 대관령국제음악제 예술감독은 아티스트로서 자신의 성장에는 음악에 대한 사랑이 큰 역할을 했다고 강조한다. 올해로 10돌을 맞은 대관령국제음악제와 1회부터 인연을 맺어온 정 감독은 지난 2011년부터는 동생 정경화(바이올리니스트)와 함께 음악제 공동 예술감독을 맡고 있다.
지난 4일 오후 구기동 자택에서 정 감독을 만났다. 그는 2시간여 동안 2년 전 세상을 떠났던 어머니 고(故) 이원숙 여사의 가르침부터 아티스트로서 삶의 궤적들을 풀어내며 깊은 감회에 젖었다.
◇세계적인 음악가, 그리고 위대한 어머니= 세계적인 첼리스트 정명화,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그리고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마에스트로 정명훈. 한 집안에서 한 명의 음악가가 나오기도 힘든데 그의 집안은 형제자매들이 저마다 악기 하나씩은 다룰 줄 아는 음악가 집안이었으며 세계적인 아티스트도 세 명이나 배출했다.
정 감독은 어머니의 음악에 대한 열정과 희생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거라고 믿고 있다.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난 어머니는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 교회 오르간 소리를 듣고 유년 시절을 보내셨어요. 어릴 적부터 음악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던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저마다 하나씩 악기를 연주할 수 있도록 하셨어요.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도쿄 유학 시절 만났던 터라 교육열이 남다르기도 했지만, 두분 모두 음악을 아끼고 즐기셨던 게 저희가 어릴 적부터 음악을 가까이 할 수 있었던 이유였던 것 같아요."
1.4후퇴로 부산으로 피난 갈 때 트럭에 피아노를 가장 먼저 실었던 일화는 워낙 유명하다. 해방 뒤 경찰관으로 근무하던 남편을 일본으로 피난시킨 이원숙 여사는 어린 자식 네 명을 데리고 피난 길에 오르면서 피아노를 가장 먼저 싣고 그 위로 다른 짐을 올렸다고 한다. 먹고 사는 게 그 무엇보다 중요했던 전쟁의 한복판에서도 음악 교육은 절대 멈추지 않겠다는 고집을 지켜낸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 서울 명동에 냉면집(고려정)을 차린 이 여사는 자녀들에게 저마다 좋아하는 악기를 선택하게 했고, 식당에서 번 돈은 당시로선 희귀했던 악기 구입비와 레슨비로 고스란히 쓰였다.
안채로도 사용했던 식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명동예술극장(당시 국립극장)은 아이들이 문화예술을 온 몸으로 만날 수 있었던 산 교육의 장(場)이었다.
"국립극장에서 국악이나 연극, 클래식 등 어떤 공연이든 새로운 것이 들어오면 가장 먼저 극장을 찾곤 했어요. 어머니는 음악이 단순히 악기를 연주하는 기술에 그치는 게 아니라 다양한 경험을 통해 표현도 풍성해진다는 것을 그때 이미 아셨던 것이지요."
어느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고 그 아이가 가진 장점을 칭찬했던 것도 이 여사가 자식들을 세계적인 음악가로 키울 수 있었던 비결이다.
"우리 형제들은 이상할 정도로 사이가 좋았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어머니가 각자의 개성과 장점을 잘 파악하고 잘하는 것을 격려하면서 키우셨기 때문인 것 같아요. 다른 형제 혹은 다른 집 아이와 비교하는 일은 절대 없었거든요. 그러니까 우리들은 누구 하나 주눅 들지 않고 항상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생업으로 바쁜 와중에도 아이들의 시간 관리를 잘 해 주셨어요. '자라나는 아이들의 1시간은 어른의 10시간 이상으로 귀하다'고 말씀하시면서 자녀 문제에 대해선 전문가들에게 항상 자문을 구하실 정도로 열정적인 분이셨어요."
그의 아버지는 저녁 약속도 마다하고 귀가해 아이들의 연주를 즐길 정도였고, 여름이면 온 가족이 대천해수욕장에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면서 모래사장에서 합주도 하고 저녁 노을을 무대로 가족음악회를 열곤 했다고 추억한다.
◇첼로와의 운명적인 만남= 정 감독은 자신이 첼로와 인연을 맺은 것은 운명이라고 말한다. 처음에는 오빠, 동생들과 함께 피아노를 배웠지만 피아노 앞에만 앉으면 졸릴 정도로 지겨웠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노래를 좋아했던 정 감독은 악기를 통해 사람의 목소리를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가 컸지만 피아노만으로는 그런 바람이 충족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바이올린을 만났지만 바이올린의 고음이 정 감독에게는 어색하기만 했다.
"동생 경화는 바이올린을 처음 잡는 순간부터 신들린 것처럼 너무 좋아했지만 저는 그렇지 않았어요. 너무 높은 소리가 제 귀에는 거슬리기만 했거든요. 그렇게 어느 악기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저를 보신 어머니가 첼로를 마련해 주셨어요. 처음 첼로를 품에 안는데, 그 순간 이게 바로 내가 찾던 내 동반자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첼로는 소프라노, 테너, 베이스 등 음을 내는 사람의 목소리와 가장 가까운데다 단음 표현도 너무 자연스러워서 무척 끌렸어요. 그런데 악기에 대한 감정도 사람마다 다른 가봐요. 경화는 바이올린이 가장 사람의 음성과 가깝다고 하고, 명훈이는 화음을 만들어낸다는 면에서 피아노에 매혹됐으니까요." (웃음)
정 감독은 자신의 음악 인생을 지켜준 세 명의 은사를 자주 떠올린다. 처음 첼로를 손에 쥐었을 때부터 6년 동안 자신을 지도한 김재영 선생, 뉴욕 줄리어드 음악원 시절 뉴욕 필하모니 수석 첼리스트였던 레너드 로즈 교수, 그리고 줄리어드 졸업 후 만난 베를린필하모니의 수석 연주자인 피아티고르스키(Gregor Piatigorsky)에게 3년 동안 배운 마스터클래스 등이다.
"음악을 하다 보면 타고난 재능이 뛰어난 아이를 발견하곤 합니다. 물론 그 아이들도 노력을 통해 세계적인 음악가로 성장하지만 음악에 대한 애정 없이는 진정한 음악가로 자리잡기 힘들어요. 저를 지도해 주신 선생님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항상 저한테 잘 한다고 칭찬해 주면서 제 스스로 음악가로서 저 자신을 사랑하고 첼로를 아끼도록 독려했다는 점입니다. 제가 갖고 있는 음악적 재능에 확고한 믿음을 심어주니 저 스스로도 자신감이 생기게 되지요."
그래서 정 감독 스스로도 학생들에게 "유명해지려고 음악을 하지 말고, 음악을 깊이 있게 즐기라"는 말을 자주 하곤 한다.
첼리스트로서 그에게 지금까지도 잊지 못할 공연은 무엇일까. 그는 1967년 주빈 메타의 LA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할 때를 자주 떠올린다. "국제 무대에 공식 데뷔하기 2년 전이었으니 너무도 가슴이 벅찼을 때였죠. 당시 주빈 메타는 서른 한 살이었는데 무대 전체에 에너지가 넘쳤을 정도로 대단한 공연이었어요."
1969년 정식 데뷔를 한 정 감독은 미국은 물론 유럽 등지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어왔다.
◇대관령국제음악제를 세계적인 음악제로= 정 감독은 지난 2004년 강효 감독의 요청으로 대관령국제음악제 산하 음악학교에서 어린 학생들을 지도해왔다. 2011년부터는 동생 정경화 줄리어드 음대 교수와 함께 예술감독을 맡아 3년째 음악제를 꾸려오고 있다. 대관령국제음악제는 미국의 애스펀 음악제를 롤 모델로 탄생했다. 애스펀 음악제는 지난 1949년 시카고에서 콘테이너 회사를 경영하던 기업인 월트 펩케가 '괴테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마련한 행사 중 하나였다. 해발 1,600m의 고원도시로 한적한 시골 폐광마을에 지나지 않았던 콜로라도주의 애스펀은 음악제 유치를 계기로 지금은 세계 최고의 음악가와 음악도들을 불러 모으며 클래식 음악의 메카로 자리를 잡았다. 애스펀 음악제 외에도 스위스 루체른 페스티벌,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페스티벌 등이 모두 수려한 풍광 속에서 펼쳐지는 한여름의 음악 축제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정 감독은 "처음에는 해외 유명 뮤지션을 초청하는 데 애를 먹었지만 지금은 오고 싶어하는 분들이 많을 정도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며 세계적인 음악축제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고 평가했다.
강원도의 새로운 고부가가치 문화상품을 내건 대관령국제음악제는 공연 티켓 예매율이 90%를 넘을 정도로 인기를 얻고 있다. 지난 2011년 입장권 총 수입은 1억 2,000여만원, 2012년에는 2억 400만원, 올해는 2억 2,000만원을 상회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으며 경제유발효과도 15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아울러 '음악축제'의 테두리 안에서 '음악학교'를 운영하면서 클래식 신예들이 세계적인 뮤지션으로부터 음악의 가치를 배우고 교류하는 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평가다.
정 감독은 "지난 10년 동안 음악제가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알려지면서 이미 '아시아 톱' 수준으로 발돋움한 것으로 평가된다"며 "10돌을 맞는 이번 음악제도 잘 치러내 아시아를 넘어 세계적인 음악제로 자리 잡도록 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She is… ▲1944년 서울 ▲1965년 줄리어드 음대 졸업 ▲1971년 제네바 국제음악콩쿨 첼로부문 1위 ▲1990년 뉴욕 매네스 음악원 교수 ▲1992년 은관문화훈장 ▲1993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 ▲2008년 세계한인의 날 홍보대사 ▲2009년 서울특별시문화상 문화상 ▲2011년 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 ▲2011년~ 대관령국제음악제 예술감독 |
음악영재 산실 대관령국제음악제 음악학교 대관령국제음악제 산하의 음악학교가 세계적인 음악가를 배출하는 산실로 성장하고 있다. 매년 15개국에서 130여명의 학생들을 선발해 음악영재 양성에 힘을 쏟고 있다. 지금은 일반인들도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클라라 주미 강이나 신지아, 폴 황, 강승민, 문웅휘 등은 수년 간 대관령국제음악제 음악학교 학생으로 있다가 아티스트로 성장한 케이스다. 타고난 천재성과 끝없는 노력으로 새로운 음악 퀸의 탄생을 알리고 있는 클라라 주미 강(바이올린)은 2007~2009년 이곳에서 배운 후 2010년부터 올해까지 음악제에 아티스트로 참가하고 있다. 그는 지난 2010년 세계 3대 바이올린 콩쿠르라 불리는 미국 인디애나폴리스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와 일본 센다이 국제 바이올린 콩쿠르에서 동시에 우승하며 전세계를 놀라게 했다. 대만 출신인 폴 황(바이올린)은 14살 때 줄리어드 음대 예비학교에 입학했으며 강효 교수를 사사했다. 그 인연으로 강 교수가 초대 예술 감독으로 이끈 대관령국제음악제 1회부터 학생으로 참가했고 2009년부터 아티스트로 참가하고 있다. 그는 최근 케네디 센터, 위그모어 홀, 조던 홀, 뮈제 뒤 루브르 등에서 데뷔 공연을 가졌다. 부다페스트 도흐나니 오케스트라, 세인트 루크 오케스트라, 루이스빌 오케스트라 등과 협연한 바도 있다. 프랑스 롱-티보 국제콩쿠르 1위 수상에 빛나는 신지아(바이올린)는 2007년과 2008년 학생으로 참가한 후 2009년부터 아티스트로서 대관령국제음악제 무대에 올라섰다. 신지아는 서울시립교향악단, KBS 교향악단, 워싱턴 내셔널 오케스트라, 오사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도쿄 심포니 오케스트라, NHK 교향악단 등 국내외 유수의 오케스트라와 협연했다. 또 벳부 아르헤리치 페스티벌, 디토 페스티벌, 코펜하겐 음악제 등 국내외 페스티벌을 통해 독주회와 실내악 연주 등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풍부한 감성과 날카로운 테크닉을 조화롭게 엮어내는 연주자 문웅휘(첼로)는 정명화 감독의 제자로 대관령국제음악제와 인연을 맺은 케이스. 2007년에서 2010년까지 학생으로 참가했다. 실내악에도 남다른 열정과 사명감으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젊은 현악4중주팀, 노부스 콰르텟의 첼리스트로서 2012년 9월 세계 실내악 최고 권위의 독일 ARD국제콩쿠르에서 준우승했다. 2013년 1월 뉴욕 카네기홀에서 성공적인 데뷔무대를 가졌다. 정 감독은 "대관령국제음악제는 아티스트 산실로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실제로 젊은 아티스트들은 세계적인 거장들과 한 공간에서 연주하고 생활하는 시간을 통해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