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악산의 가을 서곡

하판리 (9:30)- 오른쪽 등산로 입구(9:45) ? 첫 이정표 (10:15) ? 안부 (10:45)- 미륵바위 (11:32) ? 정상 (12:25-1:40) ? 무지개폭포(2:55) ? 운주사 (3:35) 거리: 약 6km 지난 토요일 (2003/9/27) 가을의 서곡을 듣고 보러 초록 산악회를 따라 북한산보다 100미터 높은 가평에 있는 운악산(935m)을 찾았다. 중부지방 악(岳)자 항렬의 다섯 명산 ? 화악산, 관악산, 송악산, 치악산, 운학산 ? 중의 하나란다. 현리쪽 하판리 산행 매표소 옆에 세워 둔 화강암 자연석에 ``운악산``이란 제목의 고운 시 한 수가 음각돼 있다. * * * 운악산 운악산 망경대는 금강산을 노래하고 현등사 범종소리 솔바람에 날리는데 백년소, 무운폭포에 푸른 안개 오르네 * * * 산에 오지 않은 사람도 이 싯귀를 읊조리면 저절로 가슴에 와 닿을 것 같은 시다. 역시 시인은 언어의 마술사. 악(岳)이라는 말에서 풍기듯 8부 능선부터는 화강암 바위가 여러 작품을 연출하며 사람을 유인한다. 물론 나무들과의 조화로 운치를 더해 준다. 쇠밧줄을 잡기도 하고, 철계단과 철사다리를 오르기도 하고, 네다리로 직벽에 박아 놓은 말발굽 자석모양의 철심을 잡고 디디며 오르는 맛이 초반 밋밋한 능선을 오르는 따분함을 일거에 바꿔논다. 그러나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이나 등산 초심자에게는 아찔할 것 같다. 암봉이나 죽죽 갈라진 암벽 틈새마다 분재마냥 붙어있는 소나무는 화가들의 그림에서 많이 봄직한 수채화다. 소나무가 절묘하게 서 있는 우뚝 솟은 미륵바위가 그 중의 한 예. 가을을 만들어가는 정상 근처 8부 능선의 깍아지른 산사(山斜)의 울창한 숲에는 붉게 물들어가는 당단풍과 개옻나무가 노란색을 띠기 시작하는 생강나무와 함께 가을색을 먼저 만들어 가고 있다. 사람의 마음을 한껏 흥분시키는 가을색 -- 단풍. 물론 중턱 이하는 아직 여름. 북한산과 도봉산이 너무 사람이 많아 북적대면 이리 오라고 산세가 비슷한 운악산은 말하는 것 같다. 나와 함께 한참 떨어진 후미에 선 정재두 사진작가는 운악의 가을을 카메라에 담느라 정신없고 이상무는 땀을 비오듯 흘린다. 탁 트인 정상은 지친 심신을 한꺼번에 정상 망경대는 바위는 저리하고 흙으로 마당을 적당히 만들어 놓아 탁 트인 사방 조망으로 또 다른 맛을 보여 준다. 북동쪽으로 명지산이 우뚝 보이고 산사이에 청정한 조종천이 산 허리를 뱀처럼 구불구불 돌아 흐르고 주변에 만들어 놓은 논의 벼는 ``매미``의 피해가 없어 순금색으로 옷을 갈아입고 있다. 발아래 운악산 끝자락의 초록은 논과 대비가 돼 골프장임을 쉽게 알아 챌 수 있다. 일동으로 가는 서쪽 포천군 산사이 분지도 비슷한 광경을 만들어 놓았다. 지난 한 주의 몸과 맘에 낀 찌꺼기가 일시에 씻겨 내려간다. 매미의 하소연 매미라는 말이 나왔으니 잠깐 생각을 돌려 보자. 이 곳 운악산에도 중추로 들어서면서 아쉬워하는 매미의 소리가 한층 엷어진다. 그런데 힘빠진 소리가 이번 태풍의 최대 피해자라는 푸념으로 들린다. 물론 겨우 6시간 동안 그것도 남동부 지방만 살짝 스쳐갔는데 130명의 사망, 실종에, 5조원 가까운 재산 피해를 입은 피해민들을 생각하면 할 말이 없단다. 사람들이 시끄럽다는 불평도 없지 않지만 싱그러운 여름의 상징적 곤충으로 사람들과 한껏 친한 미물이 엄청난 인명과 재산 피해를 입힌 이름으로 이미지가 바뀌었으니 매미의 볼멘 소리도 이유가 없지 않다. 영어(cicada)로 했다면 그래도 나았을 텐데. 이 번 기회에 생물에 태풍 이름을 붙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매미의 하소연 같다. 또 다른 피해 곤충이 없도록 말이다. 그런 불평도 금년 매미는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김치찌게로 점 찍어 정상을 비켜 나무 그늘에서 자리를 잡았다. 라면, 김치 찌게로 정상주(頂上酒)를 한잔씩 기울이며 점을 찍었다. 산에서의 버너 킨 맛은 어느 진수성찬 하고도 비교가 안 된다는 것을 산을 올라본 사람은 다 안다. 식사 후 반대편 포천군 화현면 운주사쪽으로 내려오는데 하산길이 만만치 않다. 바위가 많아 밧줄, 사다리 등은 물론이고 미끄러지는 마사토의 급경사길이 한참이다. 곳곳이 아찔아찔하다. 내려오다 조망이 잘 되는 곳에 서니 단풍만 더 들면 동쪽 치마바위아래 깊은 계곡이 설악산 천불동 못지않은 풍치를 이룰 것 같은 느낌이었다. 미륵바위에서 보는 주름진 치마자락 바위와는 또 다른 맛이다. 그런데 밧줄을 잡고 사다리를 타고 한참을 내려 왔는데 하산 처음 길을 잘못 든 선두 일행 5명으로부터 휴대폰이 울린다. 길이 없어졌단다. 다시 올라와 우리쪽으로 오라니까 이것 역시 엄두가 안 나는 모양이다. 그냥 ``고`` 해야겠단다. 예삿일이 아닐 것 같다. 대궐터와 일부 남아있는 궁예성터, 신선대가 내려오는 길목에 보인다. 무지개폭포(虹瀑)위 너럭바위에서 시원한 물로 세수하고 발도 담갔다. 참나무의 대표선수 신갈나무 나라 이 산에 살아가는 나무들은 어느 산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처음 현등사 입구 가는 넓은 포장길은 소나무가 양 옆으로 그윽한 솔내음을 풍기고, 바로 오른쪽 등산로로 들어서니 참나무 중 잎이 제일 조그만 졸참나무가 바톤을 이어 받는다. 중턱을 오니 이번에는 또 다른 참나무 신갈이 큰 키에 넓은 잎으로 따가운 가을 햇살을 막아 준다. 이 산은 신갈나무 나라라고 보면 틀림이 없겠다. 가을색 중 갈색의 왕좌를 지키는 ``진짜(참)``나무. 참나무 도토리는 다람쥐가 가을 걷이를 끝낸 것인지 사람이 움쳐 갔는지 보이지가 않는다. 언뜻 보이는 다람쥐는 무서운지 금새 피한다. 큰 키 나무 아래 사이사이에 서 있는 관목-- 산철쭉, 진달래, 싸리나무-- 이 햇볕이 모자라도 불평 한마디 없이 인간의 눈을 끄는 내년 봄을 기다리는 듯 하다. 넓고 둥근 잎을 한 산목련, 쪽동백도 너울 너울 반긴다. 5월 소복한 듯 엷은 미색 꽃을 피면 돋보이는 이쁜 나무들… 오동나무 빼고 저들보다 넓은 잎 가진 나무 있으면 나와 보란 듯이 이 곳 저 곳에 들어 서 있다. 노린재 나무는 흰 꽃을 자주색 열매로 바꾼지 오래고, 어쩌다 만난 마가목은 콩만한 빨간 열매가 없어 사람의 눈을 끌지 못한다. 꽃이나 열매가 없으면 지극히 평범하니까. 풀 종류는 노란 꽃을 피운 조그만 눈괴불주머니 외에는 눈에 들어오는게 거의 없다. 그 흔한 야생화들이 원래 없는 것인지 때가 지나 사라진 건지 알 수 없다. 이산가족 재회 후 하산주 내려와서 알게 된 것이지만 여자분 둘 포함 7명이 두 그룹으로 선두에서 다른 길을 따라 내려온 것이다. 험악한 골짜기를 따라 하산해 이산 가족 재회해 그 간 고생 얼마나 했느냐며 위로했으나 의외의 반응들. 힘은 들었지만 마음 졸이며 내려 온 맛이 이 후로 또 있을까라며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25명 일행은 윤회장님의 안내로 현리로 갈라지는 신팔리 ``동치미 국수집``에 들어가 홀을 꽉 채웠다. 파전과 부추전을 안주로 한 하산주는 등산 기분을 배가 시켰다. 백김치와 동치미국물 국수는 이 음식점의 얼굴로 소싯적 겨울 땅속에 파묻어 놓은 독에서 퍼다 먹던 그 맛이다. 음식점 화단에 무더기로 피어 눈길을 꽉 붙드는 주황색의 금불초 꽃이 등산기분의 climax를 장식한다. 운악산 가는 길 도로가 밭에는 살짝 건드려도 뿌러질 듯 고개를 툭 떨구고 있는 수수와 옥수수를 다 빼앗긴 대가 가을이 무르익고 있음을 말해 준다. 태능, 구리와 진접을 지나 47번 국도를 타고 가다 눈에 들어오는 가을이다. 또 하나는 포도. 운악산 주위 도로가에는 포도 가판이 많은 걸 보면 포도 주산단지인 모양이다. 까치를 막느라고 하얀 비닐로 포도나무 시렁을 덮고 있는 밭이 눈에 많이 띈다. 신팔리와 현리사이의 구불구불 옛 도로를 일자로 펴느라고 곳곳이 공사중이다. 2시간도 채 안 걸리는 운악산까지의 길을 더 빠르고 더 편리하게 만들어 주겠다는 데 할 말은 없지만 구불구불 난 길을 달리는 맛도 참 좋은데… 득이 있으면 실도 뒤따르는 법. 오는 길에 찻속에서 재기 발랄한 젊은이가 사회를 맡아 일행들의 흥을 돋군다. 노래 실력은 나를 빼면 너나가 없어 보인다. 에필로그 가을의 가운데 도막인 10월에 들어선다. 잦은 비로 단풍이 곱지 않을 거라는 예보도 있었지만 그래도 부지런히 찾아가 가을산을 마음과 오관(五官) 으로 열심히 읽어봐야겠다. <채희묵 chaehmoo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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