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권정치로 악명 높은 블라드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내년 2월 열리는 소치 동계올림픽을 의식한 잇단 유화 제스처로 국제사회의 환심 사기에 나서고 있다.
19일(현지시간) 외신들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은 이날 전 석유재벌이자 자신의 정적인 미하일 호도르콥스키(50)에 대해 '깜짝' 사면 결정을 내렸다. 지난 2003년 사기 및 횡령·탈세 등의 혐의로 체포돼 11년형을 선고 받고 10년째 장기 복역 중인 호도르콥스키는 거대 석유기업 유코스의 회장이자 러시아의 신흥 재벌을 의미하는 '올리가르히'의 대표적 인물이다. 야당 정치권에 대한 지원 필요성을 강조해 미운털이 박힌 그는 투옥 중에도 푸틴과 대립각을 취하며 푸틴의 잠재적 경쟁자로 평가 받아왔다.
푸틴 대통령은 이날 4시간여 동안 진행된 연말 기자회견에서 "이미 감옥에서 10년을 보냈고 그의 어머니가 아픈 점을 고려했다"고 사면 이유를 밝혔다. 인도적 차원의 결정이라는 뜻이다. 이에 대해 일리야 포노마레프 러시아 하원 의원은 "최근 몇 년 새 가장 놀랄 만한 뉴스"라며 "푸틴이 국제사회에 보내는 상징적 제스처"라고 말했다.
푸틴의 제스처는 내년 소치올림픽을 겨냥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푸틴은 지난 2007년 유치 결정 후 소치에 460억달러(약 48조8,335억원)를 쏟아부었지만 정작 개막 2개월여를 앞둔 현재 소치올림픽에 대한 국제사회의 시선은 싸늘하기만 하다. 특히 최근 반동성애법 제정, 반정부 인사 탄압 등 러시아의 반인권 움직임에 반대하는 의미로 미국·프랑스·독일 대통령 등이 올림픽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하는 등 서구권의 움직임이 심상찮다. 올림픽 흥행을 통해 글로벌 리더로서의 입지를 굳히려는 푸틴으로서는 애가 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내민 카드가 호도르콥스키의 사면이다. 러시아는 이에 앞서 지난해 2월 푸틴에 반대하는 공연을 펼치다가 붙잡힌 여성 펑크록 그룹 '푸시 라이엇'과 러시아 국영 에너지 기업 가스프롬의 해저 유전 개발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다 구속된 국제환경단체 그린피스 회원 30여명 등 총 2만여명에 대한 사면령을 승인하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정적에 대한 사면 결정이 그만큼 푸틴의 자신감이 충만하다는 의미라는 해석도 나온다. 러시아 야권 세력들 사이에서는 내년 만기 복역 후 출소를 앞두고 있던 호도르콥스키를 자신들의 정치 지도자로 삼으려는 움직임이 강했다. 러시아 카네기센터의 드리트리 트레닌 소장은 "이번 결정은 푸틴이 더는 호도르콥스키를 위협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는 의미며 러시아 내 반정부 세력에 대한 푸틴의 판결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이런 푸틴의 자신감은 최근 국제사회에서의 연이은 외교적 승리에서 비롯됐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분석했다.
이란 핵 문제, 시리아 사태 등을 둘러싼 미국과의 대결, 최근 우크라이나를 사이에 둔 유럽연합(EU) 측과의 힘겨루기 등을 통해 우월적 지위를 과시하고 있는 푸틴이 정적 사면이라는 '통 큰 결정'을 통해 다시 한번 글로벌 리더로서의 이미지를 굳히려 한다는 것이다. 글렙 파블롭스키 정치 전문가는 "푸틴은 자기 스스로 '단일 위협' 이상의 존재가 됐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평가했다.
반면 파이낸셜타임스(FT)는 칼럼에서 "의도적인 관용을 베풂으로써 이득을 보려는 독재자의 계산된 행동에 불과하다"며 "전세계로부터 존경 받기를 갈구하는 푸틴의 허영심"이라고 평가절하했다.